발길머무는 여행지

울릉도 1 - 여행을 위한 자료들

창현마을 2006. 1. 25. 14:02

 

1,울릉도 개요

 

호 칭 : 울릉도는 삼국사기에 우산국(于山國)이라 기록되었는데, 그 시대에 현(現) 울진군을 우진(于珍)이라 불렀으므로 우진에 속한다하여 우산도라 하였는바 우(宇)와 울(蔚)이 울(鬱)도 통하고 산(山)과 릉(陵)이 통하여 울릉(鬱陵)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한다.
지 형 : 화산암으로 형성된 오각형의 섬, 성인봉(해발984m)중심으로 분수령 형성, 산악은 험준하고 나리분지외 대부분 경사지로 형성
기 상 : 맑은날 - 55일, 강설 - 198cm, 강우량 - 1,193m/m
기 후 : 해양성기후, 여름 시원, 겨울 온난다설, 평균기온12°
특산물 : 오징어, 호박엿, 약초(천궁), 향나무제품, 돌김, 더덕, 산채(삼나물, 고비, 부지갱이, 전호, 미역취 등)
특 색 : 三無 - 도둑, 공해, 뱀
五多 - 향나무(香), 바람(風), 미인(美), 물(水), 돌(石)
위 치 : 동해유일의 도서군 - 동경130°54′, 북위37°29′ 포항-217㎞, 후포-159㎞, 묵호-161㎞, 휴전선-118㎞ ※가장 가까운 육지 :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임원리 137㎞
면 적 : 72.558㎢(경상북도의 0.4%) - 우리나라에서 7번째 큰섬 동서직경 10㎞, 남북직경 9.5㎞, 섬둘레 56.5㎞, 임야76%, 농경지18%, 기타6%
도서수 : 44개섬(유인도3, 무인도41)
가구ㆍ인구 : 3,692가구 9,245명 (2003년 12월 末 기준)
행정구역 : 1읍 2면(1출장소) 25리 55마을

 

 

2, 울릉도역사

 

 

울릉도는 무릉, 우릉, 우산,으로 불렸던 섬이다.

1000년대 초 일본인들은 우루마로 불렀으며1700년대 프랑스인들은 다쥐레(Dagulet)로 기록했다.

이두로 보아야 할 이 한자 표기들의 주류인 울릉과 우릉은 'ㄹ'이 하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그리고 우산은 우뫼로 읽힌다. 여기에 일본인들의 우루마 곧 울마를 고려하면 울릉과 우릉의 받침 소리는 'ㅇ' 이 아니라 'ㅁ'이었지 않나 싶다.

우뫼, 울마, 울름, 우름에 가장 가까운 소리는 우르뫼의 줄임말 울뫼다. 울릉도의 본래 이름은 이렇듯 산에서 온 것이다.(울뫼의 울은 나리분지를 울타리처럼 두른 산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울릉도의 높은산이라고는 성인봉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은 산 없는 봉이다. 본래 산이었던 것이 봉으로만 이름이 남은 것이다. 이 추론이 맞다면 개관에서 언급한 가설은 여기서 정설로 입증된다.

울릉도에서 발굴된 가장 오랜 유물은 김해식 토기 전통이 약간 남아 있는 조잡한 갈색 승문토기다. 석기나 고인돌은 물론 없다. 이로 볼 때 울릉도에 사람이 처음 들어간 것은 김해식 토기 시대 후기인 1세기쯤으로 추정된다. 울릉도로 추측되는 것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옥저조다. ['고구려 동천왕 20년(246). 고구려에 쳐들어온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현도군의 태수 왕기로 하여금 동천왕을 남옥저(지금의 함남 남부 지역)까지 쫓게 하였다. 거기까지 온 왕기가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사느냐고 묻자 그 지방 사람이 "언젠가 풍랑을 만나 동쪽의 한 섬에 도착한 적이 있었는데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말이 잘 통하지 않았고 칠월이면 소녀를 골라 바다에 빠뜨리는 풍습이있다고 들었다" 하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 대해 일본인 역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 박사는 그섬은 틀림없이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 기록은 울릉도에 관한 가장 오랜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우산국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부터 보인다. 바로 거기에 신라 지증왕 13년(512) 하슬라(강릉) 주둔군 사령관 이사부가 뱃머리에 나무 사자를 세워 우산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고학자 김원룡 박사는 그 우산국 사람들이 낙동강 동쪽, 지금의 강원도와 경상도 바닷가 지방 출신들이라고 본다. 그랬기에 점령 당시 이사부의 나무 사자 거짓말이 통했다는 것이다(이사부가 거짓말을 할때 통역을 썼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기록의 문맥으로는 직접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400년 넘게 자취를 감춘 울릉도가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은 고려 통일 전야인 태조 13년(930)이다(그동안 울릉도는 정말 태평성대를 구가한 것으로 보인다). 백길, 토두라는 우릉도 사람 둘이 공물을 가지고 왕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90년쯤 뒤인 현종 9년(1018)에는 고려 조정에서 동북 여진 해적들의 노략질로 초토화된 우산국에 농기구를 보내 주고 13년에는 해적을 패해온 섬사람들을 지금의 경상도 영해 지방에 살 수 있도록 조처하고 있다.

현종 때는 여진 해적의 극성기였다. 1019년에는 그들이 50척이나 되는 배를 이끌고 일본의 규슈 지방까지 내려와 463명을 죽이고 1,230명을 잡아갔을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해적들이 포로가 되기도 했는데 그들은 대개 고려인으로서 여진 해적과 싸우다 잡혀 어쩔 수 없이 해적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한다(일본 역사책에만 보이는 기록이다).

숙종 2년(1097) 안변도호부의 판관 안증은 원산 앞바다에서 열 척의 해적선과 맞붙어 40명을 죽이고 세 척을 나포했다. 숙종 12년(1107)과 그 이듬해에는 윤관이 동북 여진을 쫓고 거기에 9성을 쌓았다. 근거지를 뺏긴 여진족들은 1115년 하얼빈 부근의 회령 지방으로 옮겨 중원으로 쳐들어간다.

1125년에는 요나라를 멸망시키더니 이태 뒤에는 송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의 노른자 황하 유역을 차지한다. 동양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윤관의 일격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울릉도 사람들의 기록은 이보다 한참 전인 덕종 원년(1032)을 끝으로 끊기고 만다. 해적들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현종 13년의 경우처럼 모두 육지로 나와 버렸던 것 같다. 이후 인종 19년(1141)과 의종 11년(1157)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해 사람이 살 수 있는가 보지만 조사로 그쳤을 뿐이었다.

울릉도에 다시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기 시작한 것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최중헌이 왕에게 시무 10조를 건의한 1200년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왜구라는 해적들이 몰려왔다. 그리하여 고종 10년(1223)부터 시작되어 조선 세종 원년(1419) 이종무가 대마도 정벌을 할 때까지 196년 동안 500여 회나 쳐들어왔던 그들 때문에 울릉도는 다시 무인지경으로 되돌아갔다. 그럼에도 들어가 사는 사람이 간혹 있었다. 산것, 갯것이 지천인데다 자유의 땅인 터라 버젓이 살 처지가 안 된 사람들에게는 그만한 유토피아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조정에서는 군대를 보내 사람들을 잡아 육지로 끌고 들어오곤 했다. 사람이 있으면 왜구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조선 태종 3년(1403)과 13, 14년, 세종 7년(1425)과 20,23년 무렵이었다. 이후 울릉도는 정말 빈 섬이 되었다.

이 지경에 이르자 일본인들은 저들 마음대로 들어와 나무를 베어가고 고기를 잡아갔다. 심지어는 제나라 땅이라며 다케시마라는 이름까지 붙여 놓았다. 그래서 동래 어부 안용복은 숙종 19년(1693)과 22년에 일본 막부로부터 독도는 조선땅임을 확인받아 이것이 양국 정부간의 공식 협약이 되게 했다. 그리고 고종 19년(1882) 조정에서는 마침내 공도정책(섬에 사는 것을 불법으로 치는 것)을 버리고 개척령을 발표하여 울릉도의 역사를 이었다.

 

3, 울릉도의 전설

 

  성하신당

믿을 수 없으면서도 믿고 있는 것이 전설이 아닌가 싶다.

될 수 있는한 신기하게 다루어 전해지는 전설도 그 지방다운 원인들을 조정하여 사실인양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태하동에 있는 성하신당 -당시의 "성황당"- 의 설립 유래가 너무나 비애스러워 울릉도의 대표적인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전설의 시작

조선 태종시(1417년) 삼척인 김인우를 울릉도 안무사(按撫使)로 명하여 울릉도 거주민의 쇄환(刷還)을 위하여 병선 2척을 이끌고 이곳 태하동에 도착하여 이곳을 유숙지로 하고 도내 전선(全船)에 대한 순찰을 마치고 내일이면 출발 귀임(歸任)할 작정으로 취침 중 이상하리만치 기이한 꿈을 꾸었던 것이다.
해신이 현몽하여 일행 중 남녀 2명(童男童女)을 이 섬에 남겨두고 가라는 계시가 있어서 안무사는 의아스럽게 생각했으나 별로 그 일에 대해서 관심이나 구애됨이 없이 다음날 출항할 것을 결심하고 날이 밝아짐을 기다리는 중 예기하지 않던 풍파가 돌발하여 출발을 중지하고 풍파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바람은 멎을 기세 없이 점점 심해 가기만 하였다.
수일간은 이렇게 기다리던 중, 안무사는 문득 전일의 현몽이 생각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일행 전원을 모아놓고, 동남동녀 2명에게. 일행이 유숙하던 곳(가옥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니 유숙하던 장소로 추측됨)에 필묵을 잊고 왔으니 찾아올 것을 명하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둘은 발길을 재촉하여 총총히 밀림사이로 사라지자 그렇게 심하던 풍랑은 거짓말처럼 멎어지고 항해에 적당한 바람만이 불어오는 것이었다.
안무사는 결국 일행을 재촉하여 급히 출항할 것을 명하니 배는 순풍을 받고 일시에 포구를 멀리하게 되었다.
이 무렵 속은 줄도 모르는 어린 남녀는 아무리 찾아도 필묵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냥 해변으로 돌아와 보니 배는 벌써 수백리 해상에서 쾌조로운 순풍을 타고 육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이 두 동남동녀의 심경은 오죽했으랴? 땅을 구르며 고함을 쳤으나 배는 어느 듯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원망스러워 울부짖던 두 어린 남녀는 이제는 지쳐 어쩔 수 없이 본래 유숙하던 자리로 돌아왔으나, 날이 감에 따라 공포와 추위, 그리고 굶주림에 시달리다 결국은 죽어갔을 것이다.
한편 안무사는 무사히 본국으로 귀착하여 울릉도 현황을 복명하였으나 당시 연민의 정과 죄의식이 마음 한구석에서 떠날 날이 없었다.
그러다 수년 후 재차 울릉도 안무(按撫)의 명을 받고 입도(入島)하여 혹시나 하는 기대에 태하동에 착륙하여 수색을 하였던 바 전년에 유숙하던 그 자리에 두 동남동녀가 꼭 껴안은 형상으로 백골화(白骨化)되어 있었던 것이다.
안무사는 이 정황을 보고 회한에 찼으나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 그래서 혼령을 달래고 애도하기 위해 그 곳에다 간단한 신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귀임하였다.
그 후 매년 음력 2월 28일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며 농작이나 어업의 풍년도 소원하고 위험한 해상작업의 안전도 빌었다.
그리고 신조 선박의 진수(새로 만든 배을 처음으로 물에 띄움)가 있으면 꼭 태하의 성하신당(성황당)에 제사하여 해상작업의 무사안전과 사업의 번창을 기원한다.

 

  촛대바위


지금의 저동마을에 어느 노인이 살고 있었다.
아내는 일찍이 죽고 딸과 둘이 살았습니다.
조그마한 배 한 척과 손바닥만한 밭이 재산의 전부였습니다.


겨울 양식이라고는 옥수수뿐이었는데 옥수수가 흉작이 되었으니 하는 수 없이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아야만 했습니다.

눈이 오는 날이라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작은 배로 바람 부는 날 바다에 나간다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온다고 쉬고, 바람이 분다고 쉴 수는 없었습니다.작은 배로 바람 부는 날 바다에 나간다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온다고 쉬고, 바람이 분다고 쉴 수는 없었습니다.

눈이 뿌리고 바람이 이는데도 배를 타고 고기잡이에 나가야만 하는 아버지의 얼굴에도 수심이 떠올랐습니다.
배가 나갈 때는 파도가 심하지 않더니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기울 때쯤에는 파도가 세고 눈발도 거세어졌습니다.
아버지를 바다에 보낸 딸은 걱정이 되어 "굶더라도 오늘은 쉬셔야 했는데... 옥수수 농사나 잘 되었던들..." "바다가 원수다" 하며 한숨을 쉬면서 기다렸으나 밤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바다에 잃고 딸은 먹는 것도 잊고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찾아 와서는"산사람이나 살아야지" 하고 마음을 달랬으나 막무가내였습니다.
몇 일을 굶은 그 노인의 딸은 효성이 지극해서인지 몇 일 뒤에는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니 바닷가에 나가보자 싶어서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파도와 파도 사이에 돛을 단 배가 떠오고 있었습니다.
"배가 들어온다!" 그 노인의 딸은 기뻐서 외쳤습니다.
`저 만큼에 보이니까 얼마 뒤에는 뭍에 닿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배는 오는 것 같기는 하나 뭍에는 닿을 줄을 몰랐습니다.
자꾸 보고 부르노라니 배에서 "곧 간다."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딸은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중을 나가야지' 싶어서 배가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파도를 헤치고 갔습니다.
때는 겨울이요 눈발이 시름시름 뿌리는데도 파도를 헤치며 배가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효성도 바다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더 이상 갈 수가 없었습니다.
지치고 지쳐서 우뚝 서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돌이 되어 버렸습니다.
`촛대바위' 또는 `효녀바위' 라고 부르는 바위가 곧 이 노인의 딸인 효녀의 화석이라고 합니다.
돌아온다던 아버지는 실은 헛것이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이 촛대바위는 현재 저동 어업전진기지 방파제의 한 부분으로 우뚝 솟아 있습니다.

  도동의 약수터


도동에는 맛이 이상하고 약이 되는 약수가 있다.
그 맛은 사이다 맛이고 쇠냄새가 난다.
자주 마시면 위장병을 낫게 하는 물이라고도 하며 나병환자가 몇 달 동안 마시고 목욕하여 완치되었다고도 한다.


옛날 옛적 일본과 싸우던 장군이 돌아가신 뒤에 그 장군이 입고 싸우던 갑옷이 이 근처

에 묻혔는데 그 갑옷은 쇠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갑옷이 삭아서 흘러내리는 쇳물이 약수가 되었다고도 한다

 

 

  성인봉


비가 많이 오기로 유명한 울릉도에 석달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물이 귀해져서 야단이었습니다.

"이상도 하다."
"비가 너무 와서 애타던 곳인데."

"무슨 큰 난리가 나려나 보다."
"울릉도도 이제 못 살겠다."
하는 소리가 나돌고 민심이 뒤숭숭해졌습니다.
이 섬의 노인들은 큰 걱정을 하였습니다. 무슨 일로 계속 가무는지 점을 치기로 했습니다. "
성인봉 꼭대기를 파 보라" 고 점장이가 말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괭이 삽 곡괭이 등을 가지고 모여들었습니다.

"무엇을 뜻한 말인가?"
" 그 점장이 말이 용하다는데."
"보면 알겠지."
"큰 구렁이가 나올지도 몰라."
"아니, 무슨 글이 나올지도 몰라."

하며 모여들었땅을 파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서로 먼저 삽질하기를 싫어했습니다.

"나는 팔을 다쳐서..."
"나는 설사를 해서 기운이 없네."
"나이 많은 분이 먼저 파야지."
"아니 島師(도사격)가 먼저 파야 해."

결국 도사(島師)가 먼저 삽질을 했습니다. 한길쯤 파들어가니 김이 물씬 솟았습니다.

"이상하다."
"이상하지."
"이상해." 하면서 호기심에 자꾸 더 깊이 파들어갔습니다.
얼마후 묻은지 오래되지 않은 시체가 나왔습니다.


"에그머니"
"이것 때문에 비가 안왔구나." 하며 시체를 개울로 굴려 버렸습니다.
그러자 비가 내리더니 소나기로 변하여 쏟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온 섬사람들은 그 점장이가 용하다고 걸핏하면 그 점장이를 찾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울릉도에 조금 이상이 생기거나 가뭄이 계속되면 섬사람들은 이 성인봉 꼭대기를 파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대개 관이나 시체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 성인봉이 명산이고 이 꼭대기에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이 잘된다는 풍수설에 의해서 그런 일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성인봉의 장군터


성인봉에는 장군의 발자국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한쪽 발자국뿐이다.
그것은 왼쪽 발자국이며 한 발자국인 오른쪽 발자국은 육지의 어느 곳에 있다고 하니 그 장군의 한 발자국의 크기는 상상하기에도 어마어마한 것이다.


하루는 육지에서 사자(使者)가 왔다.

성인봉에서는 큰 장군이 날듯하며 그 장군이 나게 되면 육지가 위협받을 것이니, 미리 그 장군이 태어날 만한 땅의 지혈을 끊는다는 것이다.
사자들은 성인봉에 올라갔다.


지리풍수설을 잘 아는 사람이

"여기다" 하고 가리키자,
사신들은 거기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한길쯤 파니까 무엇이 불끈 솟았다.

핏줄기였다.
장군이 태어날 혈맥을 끊은 것이다.
피는 흐르고 흘러서 바다에까지 흘러 내렸다.
이때부터 울릉도에는 큰 장군이 나지 않게 되고 말았다.
이 혈맥을 끊은자들은 일본인들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백꽃의 사연


어느 마을에 금슬(琴瑟)이 좋은 한쌍의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육지에 갈 일이 생겨서 육지로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루 이틀 날짜가 지나가서 남편이 돌아온다는 날이 다가왔다.
그러나 남편이 돌아오겠다는 날이 지나가고 하루 이틀 날이 거듭되어도 배는 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의 기다림이 쌓여 여러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남편은 돌아올 줄 몰랐다.


 

아내의 간절한 기다림은 어느 듯 가슴에 병이 되어 응어리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내는 기다림에 지쳤는지 병져 눕고 말았다.
이웃 사람들의 정성어린 간병에도 불구하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 남긴 말은

"내가 죽거든 남편이 돌아오는 배가 보이는 곳에 묻어 주세요."
하고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마을 사람들도 너무 정장(情狀)이 가여워 죽은 여인의 넋이라도 위로해 주려고 바닷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장사를 치르고 돌아오니 그 집 앞뜰에 있는 후박나무에 수없이 많은 흑비둘기 떼가 와서 우는데

" 아이 답답 열흘만 더 기다리지 넉넉잡아 온다.온다.남편이 온다.죽은 사람 불쌍해라. 원수야, 원수야, 열흘만 더 일찍 오지넉넉 잡아서.

"하는 것처럼 울어대어서 마을 사람들은 기이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날 저녁에 육지에서 남편이 배를 타고 돌아왔다.
남편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내의 죽음을 알고 아내가 묻힌 묘지로 달려가 목놓아 울었다.

" 왜 죽었나. 일년도 못 참더냐. 열흘만 참았으면 백년회로 하는 것을. 원수로다.저 한바다 원수로다. 몸이야 갈지라도 넋이야 두고 가소. 불쌍하고 가련하지."
하고 아내의 무덤 앞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이 남편은 아내 생각에 매일 같이 아내의 무덤에 와서 한 번씩 서럽게 울고 돌아가곤 했는데 하루는 돌아서려니 아내 무덤 위에 보지 못하던 조그마한 나무가 나있고 그 나무가지에는 빨간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은 눈이 하얗게 내린 겨울에도 얼지 않고 피어 있었다. 바로 이 꽃이 지금 울릉도 전체에 분포되어 있는 동백꽃이라고 한다.

  호박엿

이 울릉도를 개척할 당시의 일이다.

처음에는 태하의 사달령 고개를 중심으로 하여, 모두 열대여섯 가구가 여기 저기에 산재해 살고 있었다.
그 중 한 집에 과년한 처녀가 있었는데 이른봄이 되어 육지에서 가져온 호박씨를

울타리 밑에 심었다.
이 호박은 나날이 자라나서 호박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호박이 익기도 전에 그 처녀는 혼처가 생겨 그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처녀가 시집을 가고 나서 호박넝쿨에는 큼직큼직한 호박이 탐스럽게 익어갔다.

호박은 이 집에서 따먹어도 따먹어도 자꾸만 열렸다.
그리하여 가을에는 누렇게 익은 호박을 따다가 방안 가득히 채웠다.
그리하여 겨울이 닥쳐와 눈이 내리고 일없는 날들을 보내게 된 어느 하루는 그 호박으로 죽을 쑤었는데 그 맛이 그야말로 엿과 같이 달았다.
그것은 호박맛이 아니고 엿맛이었다.

그래서 해마다 호박을 많이 재배하게 되었고 겨울에는 그 엿맛과도 같은 호박죽을 쑤어 먹게 되었다.
이로써 "호박엿"이란 말이 생겨나게 되었고 호박을 많이 생산하게 되었다

 

  명이


울릉도에서 아주 이른봄에 눈속에서 자라는 나물.
바로 "명이"라고 부르는 맛 좋은 산채(山菜)이다.

 

옛날 개척 당시에는 식량이 모자라 긴 겨울을 지나고 나면 식량이 모두 바닥이 나서 굶주림에 시달리곤 했는데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모두가 산에 올라 눈을 헤치고 이

<명이>를 캐어다 삶아먹고 끼니를 이었다.
그래서 이 나물을 먹고 생명을 이었다고 해서 '명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 명이 -> 산마늘 )

  사자바위/투구봉


서면 남양리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사자암과 투구봉은 서기 500년전 울릉도를 우산국이라 부를 때, 우산국의 비화를 담고 있다.


우산국의 우해왕은 대마도에서 풍미녀를 데려와 왕후로 맞고부터는 나라일은 돌보지 않고 풍미녀의 환심사기에만 급급하였다.
또 별님이란 딸을 얻고부터는 도가 심해져 갔다.

왕후의 사치를 위해 백성과 신하의 생명까지도 돌보지 않고 신라까지 노략질을 뻗쳤다.
한편 신라백성들은 왕에게 우산국을 토벌해 달라고 호소했다.
신라왕은 강릉군주 이사부를 보냈고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으나 우산국 군선에 패하고 말았다.
이사부는 군사를 재훈련하고 계략을 세워 이듬해 다시 토벌의 길에 올랐다.
이사부가 먼저 항복을 권했지만, 우해왕은 한번 이긴터라 이를 업신여기고 사자(使者)마져 죽여 싸움을 부추겼다. 이에 신라군은 짜여진 전략대로 전투를 이끌었다.
군선의 뱃머리에 목사자부터 일제히 불을 뿜게하고 또 화살을 쏘개하며 군선을 몰게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짐승이 입에서 불을 뿜으며, 신라군사들이 큰소리로 창과 칼을 즉시 거두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섬사람을 몰살시키겠다고 하자, 우해왕을 축출하고 신라의 속국으로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우해왕이 투구를 벗고 이사부에게 항복했다.
결국 목각사자 때문에 싸움에 지고 만 우산국왕은 "내가 죽더라도 그 불사자로 하여금 영원히 우산국을 지키게 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신라 이사부는 우해왕의 소원을 덜어주기 위해 목각사자를 물에 띄웠고, 그 순간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쳐 목각사자와 우해왕이 던진 투구가 돌로 변해서 사자암과 투구봉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4, 울릉도 특산물

울릉도 약소는 울릉도 여름에 서늘하고 겨울은 따뜻한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로 575종의 목초가 고루 분포되어 자생하고 있으며 대부분이 산채,약초로 계절에 관계없이 풍부한 양의 목초를 먹고, 섬바디(일명 돼지풀)를 먹고 생육하기 합니다. 섬바디는 울릉도에서만 서식하는 목초로서 년중 울릉도 전역에 자생하는데 줄기를 쪼개어 보면 우유같은 하얀 진액이 흘러나와 일명 풀에서 나는 우유라고도 하며 한우가 제일 좋아하는 목초입니다.
울릉약소의 좋은 육질과 독특한 맛은 울릉도 자생산채, 약초 특유의 향기와 맛이 배고 영양이 풍부한 자생목초로 이상적으로 비육이 되었기 때문에 육질이 연하고 맛이 담백하다.
 

울릉약소는 왜 유명할까요?
울릉도의 자생산채와 약초를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울릉도는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은 따뜻한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로 575종의 목초가 고루 분포되어 자생하고 있으며 대부분이 산채,약초로 계절에 관계없이 풍부한 양의 목초를 섭취하기 때문입니다.
울릉약소는 섬바디(일명 돼지풀)를 먹고 생육하기 때문입니다.
섬바디는 울릉도에서만 서식하는 목초로서 년중 울릉도 전역에 자생하는데 줄기를 쪼개어 보면 우유같은 하얀 진액이 흘러나와 일명 풀에서 나는 우유라고도 하며 한우가 제일 좋아하는 목초입니다.
울릉약소의 좋은 육질과 독특한 맛은 울릉도 자생산채, 약초 특유의 향기와 맛이 배고 영양이 풍부한 자생목초로 이상적으로 비육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산국시대(신라시대) 신라토기와 더불어 소의 협골(脇骨)이 울릉도에서 출토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 사육되고 있는 울릉약소의 시초는1883년 4월 개척농민 이주시(16호 54명) 함께 들어온 소 자웅 1쌍이다.
이후 1892년 6월 洪在現 외 주민 수명이 콩 50석과 송아지 5마리(암3, 수2)를 교환하여 울진에서 반입 울릉읍 사동지역에 번식했다.
1920년대에는 소의 증식으로 매년 수십두씩 수출하였으며 1960년대에는 매년 100~200두씩 육지로 출하했다.
당시 포항에는 울릉도 약소를 구입하기 위해 온 상인들로 붐볐다고하며 육질이 좋아 육지산 소보다도 고가로 판매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는 1000여두 정도 사육하고 있으며 관광객들과 지역주민들에게 모두 공급되고 있으며, 울릉군은 98년 울릉약소브랜드를 개발 울릉약소 계열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울릉도는 위치상 중위도권에 속하는 온대해양성 기후 지역으로 대부분 산과 계곡으로 형성되어 고유의 생태적 특성을 가진 많은 식물들이 다양하게 자생하고 있다.
울릉도 산나물은 이른봄 눈속에서 싹을 틔우고, 적당한 일조량으로 맛과 질이 우수하며, 약효를 지닌 식물들이 많다. 봄철에 채취하는 식물은 대부분 식용이 가능하다.
삼나물, 고비, 명이, 울릉미역취, 전호, 땅두릅 등이 유명하다.
건신채는 연중구입이 가능하며, 계절에 따라 생채를 도동부두 등지에서 판매한다.
 

울릉도는 위치상 중위도권에 속하는 온대해양성 기후 지역으로 대부분 산과 계곡으로 형성되어 고유의 생태적 특성을 가진 많은 식물들이 다양하게 자생하고 있다.
울릉도 산나물은 이른봄 눈속에서 싹을 틔우고, 적당한 일조량으로 맛과 질이 우수하며, 약효를 지닌 식물들이 많다.
봄철에 채취하는 식물은 대부분 식용이 가능하다.
삼나물, 고비, 명이, 울릉미역취, 전호, 땅두릅 등이 유명하다.
건신채는 연중구입이 가능하며, 계절에 따라 생채를 도동부두 등지에서 판매한다.

 
삼나물
전국 유일하게 울릉도에서만 생산되는 삼나물은 이른봄부터 눈속에서 자라기 시작한 어린 새싹을 채취하여 삶아서 말린 알칼리성 산채로서 정력, 해독, 기관지에 좋고 비빔밥, 무침, 찌개, 탕류등 다양하게 요리할 수 있는 고급산채이다.

맛은 쫄깃쫄깃한 것이 쇠고기 맛이난다하여 여기서는 고기나물이라고도 하며 현재 신라호텔 잭슨비빔밥의 주된 재료중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비
전국 유일하게 울릉도에서만 생산되는 삼나물은 이른봄부터 눈속에서 자라기 시작한 어린 새싹을 채취하여 삶아서 말린 알칼리성 산채로서 정력, 해독, 기관지에 좋고 비빔밥, 무침, 찌개, 탕류등 다양하게 요리할 수 있는 고급산채이다.

맛은 쫄깃쫄깃한 것이 쇠고기 맛이난다하여 여기서는 고기나물이라고도 하며 현재 신라호텔 잭슨비빔밥의 주된 재료중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섬더덕
울릉도 섬더덕의 특징은 심이 없고 부드러워 식용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하다.
울릉도의 산채 재배 방식은 반 임야 형태의 재배로 임야와 전(田)의 구분이 되어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 관광객들이 야생 산채라고 생각하여 농가의 밭에서 더덕을 채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더덕은 무기질이 풍부하고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비타민B등 영양가가 고루 갖추어진 고칼로리의 영양식품으로서 더덕구이, 더덕장아찌, 더덕주, 더덕약죽 등 다양하게 요리할 수 있는데 더덕구이의 경우 육지산 더덕은 껍질을 벗긴후 찬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다음 구이하나 울릉도산은 아린맛이 없어 바로 구이할 수 있다.
울릉큰미역취
미역취는 전국 곳곳에 자생하고 있는데 울릉큰미역취는 육지산 미역취 보다 잎이 큰 것이 특징이다.
울릉도 전역에 자생하고 있으며 울릉도에서 생산되는 산나물중 비타민 A를 가장 많이 함유하고 있어 피부를 매끄럽게 하고 감기에 대한 저항력을 높이고 호흡기를 튼튼히 하고 시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썸쑥부쟁이
모양은 취나물과 비슷하게 생겼고 울릉도에서는 부지갱이라고 부르는데 이른봄 새순을잘라 요리에 사용하면 그 향이 일품이다.
매년 12월말부터 다음해 3월초까지 눈속에서 자란 부지갱이를 수확하여 서울등 대도시로 출하하는데 그 맛과 향이 타지역 산채와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우수하여 높은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땅두릅
땅에서 나는 두릅이라 하여 땅두릅이라 하는데 울릉도 전역에 집단적으로 야생하고 있다.
향기가 뛰어나고 씹히는맛이 사각거려서 상쾌하고 담백한맛이 일품이다.
식용방법은 생채로 고추장 또는 마요네즈와 함께 먹을 수 있고 초고추장무침, 볶음, 저림등 다양하게 이용된다.
전호
전호는 울릉도에서 가장 일찍 싹이 움터나오는 산채로 12월경부터 채취가 가능하다 한겨울 눈덮인 산에서 눈을 헤치고 전호를 채취한다.
향미가 독특하고 여기서는 울릉약소숱불구이 요리점에서 제레기 (샐러드)로 많이 사용하며 저장성이 거의 없어 육지로는 많이 반출되지 않고 울릉도에서만 맛볼수 있다.
초봄 울릉도를 방문한 관광객들이 전호를 채취한다고 산으로 올라가서는 돼지풀(섬바디)를 한자루씩 뜯어오곤 한다.
(섬바디와 전호는 비슷하게 생겼음)
 
섬엉겅퀴
옛날에 스코틀랜드에 침입한 바이킹의 척후병이 성밑에 난 엉겅퀴 가시에 찔려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성내의 병사들이 깨어나 바이킹을 물리쳤습니다 그후 구국의 공로로 스코틀랜드의 국화가 되었다지요?
뭐니뭐니해도 울릉도산채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산채는 엉겅퀴이다.
육지에서는 먹지 못하는 식물로 분류되어 있지만 최적의 기후와 토양조건 속에서 자라는 울릉도 섬엉겅퀴는 가시가 부드러워 취나물보다 더 비싸게 거래되고 있다.
주로 꽁치, 된장과 함께 요리하며 감자탕에도 들어가는데 해장국으로는 그만이다.
 
어성초(약모밀)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울릉도를 비롯한 남부지방의 산속, 그늘지고 물기가 많은땅에 자라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어성초는 지구상의 식물 가운데서 항균작용이 가장 강력한 식물중의 하나로 알려져있는데 항생제 '설파민'보다 수십배나 항균력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울릉도에서는 현재 울릉도전통주의 재료로 사용되며 일본의 경우 그 효능이 인정되어 과자, 요리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한다.
소량으로 달여 먹으면 음료수가 되고 진하게 달여먹으면 약초로 사용할 수 있는데 축농증, 만성중이염 및 화농성중이염, 치질.치루, 습진.무좀, 폐렴, 농약을 마셨을 때, 등 그 효능이 다양하다.
 
명이(산마늘)
산마늘은 해발 700m이상의 고산지대와 울릉도 전역에서 자생하고 있으며 '94년 울릉도에서 반출되어 현재 강원도 일부지역에서 재배되고 있다.
울릉도에서는 깊은 산속 도처에 널려 있으니 재배는 하지 않으며 품질 또한 타 지역 산마늘과는 비교할 수 없다.

 

 

출처 : 울릉관광여행사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