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머무는 여행지

익산 미륵사지- 미륵사탑

창현마을 2006. 1. 20. 15:28

 

 

 

 

 

 

 

 

 

 

 

 

 

 

 

 

 

 

 

 

 

 

 

 

 

 

 

 

 

 

 

 

 

 

 

 

 

 

 

 

'미륵사지석탑' 해체는 과학이었다
'3D스캐너' '광파측정기'등 첨단기기 동원해 실측, 도면 작성


[조선일보]
지난 3월 10일 기차는 전북 익산역에 도착했다. 금마면 가양리에 위치한 미륵사지(彌勒寺址)까지는 택시로 15분 정도 거리였다. 입구에서 보니 저 멀리 미륵산과 두 개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동쪽의 9층 석탑과 한창 해체공사 중인 서쪽의 미륵사지 석탑을 둘러싼 컨테이너 박스였다.

5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 속으로 들어섰다. 순간 ‘헉!’ 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웅장했던 미륵사지 석탑은 온데간데없고 1층 기단부만 남아 있었다. 탑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해체된 상태였다. 석탑에서 떼어낸 화강암 부재(部材·석탑에 쓰인 재료) 수십 개가 ‘IN2-LEV 옥받 79’와 같은 번호를 각각 붙인 채 도열해 있었다. 현장에는 석공들의 망치질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1915년 일제시대 때 허물어진 탑을 보수하면서 덧칠한 시멘트를 직접 떼내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문화재 복원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될 초대형 프로젝트가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전북 익산에 위치한 국내 최대ㆍ최고(最古)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彌勒寺址石塔·국보11호, 14.24m) 복원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의 주도 아래 이뤄지고 있는 이 사업에는 10년 동안 총 80억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최근에는 2층 옥개 받침석을 해체하던 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호(小壺·작은 항아리 형태의 사리함) 조각 2점과 고려시대 기와조각, 조선시대 상평통보 한 닢이 한꺼번에 발견됐다는 보도로 화제를 모았다. 기자는 사흘 일정으로 그 역사적인 현장을 찾았다.

미륵사, 1400년 전 백제 무왕이 지어

1400여년 전 백제 무왕(600∼641) 때 지었다는 2만평 규모의 미륵사. 절터만 남은 그곳을 지켜온 것은 동서 양쪽에 서있는 두 석탑이었다. 가운데 있던 목탑은 불타고 없다. 하지만 이 중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당긴 것은 바로 서탑(흔히 말하는 미륵사지석탑)이었다. 1993년 번쩍이는 화강암으로 복원한 9층짜리 동탑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반면, 세월의 장고한 흔적을 품고 있는 서탑은 보는 이에게 감탄과 충격을 주었다. 마치 목탑처럼 돌을 깎아 세운 백제인의 정교한 기술에 감탄하면서도, 한쪽 면 전체에 덧칠해진 흉물스러운 시멘트 범벅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적어도 몇 년 간 그 탑의 모습은 볼 수 없다. 1998년 문화재위원회에서 ‘전면 해체 수리 결정’을 낸 이후 2001년 10월부터 시작된 공사는 이미 6층부터 2층까지 탑을 해체했다. 올해까지 1층 기단부 해체를 마친 후 2008년까지 복원을 완성할 계획이다.






꼭대기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탑의 내부는 커다란 화강암들로 가득했다. 탑 속에도 엄청난 양의 돌을 쌓은 것이었다. 김덕문(45) 조사원은 “현재까지 뜯어낸 부재는 650개가 넘었다”며 “1층까지 다 합치면 1500∼2000여개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무게만 해도 1t에서 2.7t으로 엄청나다. 김 조사원은 “만약 탑이 무너지지 않고 9층까지 존재했다면 1만개 이상의 부재가 존재했을 것”이라며 “이 수많은 부재를 어떻게 갖고 와서 가공하고 조립해 탑을 쌓아올렸을지 미지수”라고 말했다.

현재 공사를 진행 중인 이들은 20명도 채 안 된다. 김덕문 책임조사원 외에 건축 조사원 7명, 보존처리 조사원 3명, 해체공사를 담당하는 드잡이공 홍정수(65)씨와 석공 4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4명의 석공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외지(外地) 출신이기 때문에 현장에 컨테이너 숙소를 마련한 채 머물고 있다. 여자는 딱 1명뿐인데, 그나마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양희제(37) 조사원은 “고건축 현장이라는 게 어떤 때는 장비를 메고 산에 올라가 일주일이나 한 달 동안 지내기도 하고 365일 중 360일은 바깥생활을 하다보니 여성들은 공사 한 번 하면 나자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기자는 숙소 한쪽에 방을 마련하고 이들과 함께 첫날 저녁을 먹었다. 아침과 저녁은 직접 해먹고, 점심만 사서 먹는다고 했다. 김치, 깻잎무침, 오징어젓갈, 돈가스, 김구이 등은 모두 반찬통째로 냉장고에서 꺼낸 것들이었다. 물론 국을 제외하고 이 반찬들은 사흘 동안 똑같았다. 막내인 김기남(27)씨는 “봄이면 대나무 죽순 캐서 먹고, 고기 잡아서 매운탕 끓이고, 김치도 담가봤다”고 말했다.

석탑에서 떼낸 시멘트만 150t

저녁 7시가 넘으니 주변이 칠흑같이 깜깜해졌고 대나무 숲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현장사무실에서 바깥의 수퍼마켓까지 가려면 5분 정도 걸어야 하기 때문에 밤이 되면 나가기 힘들 것 같았다. 옷을 챙겨입고 밖에 나왔는데, 보안용 개 두 마리가 어찌나 짖어대는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TV도, 라디오도, 신문도 없으니 정말 백제시대 절간에 와 있는 듯했다.






둘째 날은 석공들의 작업을 훔쳐보기로 했다. 이번에 해체를 맡은 드잡이공 홍정수씨는 서울 숭례문 해체복원 공사, 덕수궁 담장보수, 충남 아산 현충사 석축공사, 불국사 보수, 경복궁 근정전 월대 공사 등 굵직한 공사를 거친 국내 최고수 중 한 명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문화재에 대해 가장 관심이 높았죠. 김신조가 내려온 후 청와대 뒷담을 공사할 때와 아산 현충사 공사할 때는 특히 격려를 많이 해줬어요. 현충사에는 3∼4일마다 한 번씩 찾을 정도였죠.”






홍씨는 “기중기를 산에 올리는 데 하루종일 걸렸던 때도 있었으나, 그에 비하면 지금은 양반”이라고 말했다. 다만 2∼3년 만에 주먹구구식으로 해체해서 복원하던 작업과 달리 이번 공사는 해체 과정을 일일이 촬영하고 실측하는 등의 기초작업을 아주 세심하게 한다고 했다.

오전에는 우선 현장에 널려 있는 화강암 부재에 덮어놓은 비닐을 걷어내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왜 비닐을 덮어씌워 놓느냐”는 질문에 홍씨는 “겨울에 눈이 온 상태에서 기온이 내려가면 돌 표면이 얼기 때문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덮어놓는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공사는 망치와 정으로 시멘트를 떼어내는 작업이었다. “기계로 하면 안 되느냐”고 했더니 “기계를 사용하면 돌에 무리가 가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시멘트를 부식시키는 화학재료를 사용하자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결국 수공이 가장 낫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떼어낸 시멘트만 해도 150t, 덤프트럭 15대 분량이다. 이는 대부분 건설폐기물로 처리하고 몇 개만 샘플 보관한다.

이 시멘트는 1915년 일제가 무너진 탑을 쌓으면서 바른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는 당시 왜 시멘트를 발랐을까. 김덕문 책임조사원은 “당시 시멘트가 처음 나왔을 때니까 우수한 신소재로 여겼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시멘트로 인해 탑에 무리가 갔느냐”는 질문에 그는 “직접적인 영향보다는 간접적인 영향을 줬다”고 설명했다.

“시멘트는 눈이나 비가 오면 흡수하는 성질이 있는데, 수분이 증발하면서 화강암과 붙은 부분에서 풍화를 앞당긴 면이 있어요. 그리고 150t이 넘는 엄청난 양의 시멘트가 탑의 하부구조에 좋은 영향을 줬을 리는 없죠. 시멘트는 50년 이상 되면 구조기능이 약해지거든요. 90년 가까이 되니까 자체 무게만 갖고 있었던 겁니다. 탑의 수명을 생각할 때 해체가 바람직해요.”

김 조사원에 따르면 일제는 탑 전체가 무너질 위험 때문이었는지 탑에는 거의 손을 대지 못한 채 시멘트만 덧칠했다고 한다. 시멘트를 바르기 직전 일제가 실측 조사한 도면과 이번 해체과정에서 나온 부재의 위치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한편 부재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大正四年(다이쇼 4년)’이라고 새겨진 것이 눈에 띄었는데, 이는 시멘트로 덧칠할 때 새겨 넣은 것이라고 한다.

홍정수씨는 “석조물 자체가 큰 데다 돌 하나하나를 조사해가면서 하니까 다른 작업보다 훨씬 더디다”며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나무로 틀을 짜는 등 안전관리도 해야 하기 때문에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홍씨는 부재 하나라도 깨뜨리지 않기 위해 목재틀과 부재가 닿는 부분에는 1㎝가 넘는 방진(防振ㆍ진동을 막음) 고무를 덧댔다고 설명했다.

30년 넘게 석공을 해온 진상천(54·문화재수리기능자 2847호)씨는 “시멘트가 오래 되다보니 돌보다 훨씬 단단하다”며 “다행히 오래된 돌에 시멘트를 발랐기 때문에 찰싹 달라붙지 않고 부수면 잘 떨어진다”고 말했다. 예전에 이곳으로 소풍을 오기도 했다는 진씨는 “이렇게 직접 복원에 참여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작은 돌 하나도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기저기서 시멘트 덩어리들이 튀어서 곁에 서있기가 위험했다. 석공 조경칠(54)씨는 “돌은 망치로 힘차게 때리면 반동이 있는 반면, 시멘트는 반동이 없어 힘이 더 든다”고 했다. 반복적이고도 정교한 작업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이번 작업의 특징 중 하나는 일반인들이 그 과정을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는 것이다. 연간 50만∼60만명이 관람하고 갔다고 한다. 이날도 많은 관람객들이 석공들의 작업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매년 50만~60만명 관람

정작 중요한 작업은 사흘째에 있었다. 복원을 위한 기초자료를 만드는 과정은 그 자체가 ‘과학’이었다. 김덕문 책임조사원은 “종전에는 해체하면 기본적인 조사만 하고 탑을 쌓는 데 반해 이번 작업은 부재 해체 단계에서부터 모든 형태와 상황을 조사, 기록한다”고 밝혔다.

일단 시멘트 해체 작업이 끝나면 다음부터는 모두 10명의 조사원들 몫이다. 사진, 동영상 촬영은 기본이다. 건축 조사원들이 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다. 첫번째가 ‘3D스캐너’를 이용한 촬영이다. 3D스캐너는 석탑 각 부분에 레이저를 쏘아 입체적인 형상을 얻어내는 기계다. 한 번 촬영하면 150∼200MB나 된다고 한다. 신명종(30) 조사원은 “스캐너로 촬영한 사진은 컴퓨터에 저장돼 미륵사지석탑 형상이 없어져도 가상공간에서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기술을 가미할 경우, 원형이 훼손된 석탑은 원형까지 추정복원이 가능하다.

하지만 3D스캐너의 치명적인 단점은 형체 위주이기 때문에 실제거리 파악이 약하다는 점이다. 이를 보완할 장치로는 ‘광파측정기’가 있다. 이는 LPGA에서 골프공이 날아간 거리를 측정할 때 쓰는 기계와 같은 것이다. 김태곤(31) 조사원은 “기준점에서부터 각 부재 모서리에 찍어놓은 세 점에 레이저를 쏘아서 되돌아오는 시간으로 거리를 측정한다”며 “3차원 거리와 각도까지 측정이 가능해서 나중에 탑을 복원할 때 아주 유용하다”고 말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한 단계 과정이 더 있다. 바로 현촌도(delineation·실측도면) 작성이다. 부재 위에 아크릴판을 갖다대고 실물 크기대로 도면을 그리는 것이다. 6면체를 모두 그린 다음 트랜싱지(습자지와 비슷함)에 다시 옮겨 그린다. 이것을 스캔받은 후 이미지 파일로 변형, Autocad 프로그램으로 실물도면을 만드는 작업이다. 현재까지 850장의 도면을 그렸다고 한다.

건축과 함께 보존처리팀에서도 분주하게 움직인다. 기초 조사가 끝나면 거대한 화강암 부재들이 호이스트(비교적 소형의 화물을 들어올리는 장치로 상하전후 네 방향으로 움직인다)에 매달려 바닥으로 내려온다. 이때 보존처리팀에서 가장 먼저 세척을 한다. 물로 씻는 줄 알았는데 ‘건식 세척’이었다. 기계에서 뿜어져나오는 바람을 통해 흙이나 먼지를 제거하는 작업이었다.

보존처리팀에서 하는 일도 다양했다. 첫번째가 부재 연구다. 화강암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채석산지와 광물의 성분조직 분석은 필수적이다. 이 때문에 보존처리팀에서는 부재 표면에 전자현미경을 대고 일일이 사진을 찍는다. 두 번째가 생물침해 조사다. 양희제 조사원은 “탑에 서식하면서 부재에 침해를 가하는 생물이 36종 정도 발견됐다”며 “이 생물들을 제거하고 침해를 막기 위한 약품을 연구하고 있는데 현재 시약 테스트 중”이라고 말했다. 테스트가 완료되면 나중에 탑을 복원할 때 이 시약을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마지막이 환경조사다. 석탑 주변의 온ㆍ습도, 풍향, 강우량을 매일 체크하는 ‘자동온도 관측기’를 설치해놓고 기록, 일별ㆍ월별ㆍ연별 데이터를 정리한다. 양희제 조사원은 “탑 하나를 해체하고 쌓는 데 10년씩이나 걸리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해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탑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적어도 동탑처럼 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중국·이탈리아 전문가들도 참관

이런 최첨단 과학을 동원한 해체작업 덕분에 가와이 하야오 일본 문화청 장관을 비롯해, 유네스코 산하기관 및 중국 국가문물국 관계자, 이탈리아 문화재 보존 관련 학자 등이 이곳을 다녀갔을 정도다.

하지만 엄청난 작업을 진행 중인 조사원들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복원 자체가 워낙 논란의 소지가 많은, 한마디로 ‘욕을 들을 수밖에 없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일용직이라 10년 후의 신분보장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다. 김덕문 조사원은 “10년이면 웬만한 작업 4∼5개는 할 수 있는 기간으로 개인적으로 무척 손해”라며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30대 초반인데 중간에 그만둘까봐 걱정”이라고 밝혔다. 문화재 보존이라는 보람이 아니고서는 견디기 힘든 조건이라는 것이다.

김 조사원은 “역사에 대한 이해와 현대적인 기술을 다 함께 알아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라며 “역사가로서의 양심과 일반인의 기대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가 가장 괴롭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더욱 중요한 ‘복원’이라는 과제가 남아있다. 어떤 식으로 복원될지는 초미의 관심사다. 1999년 무려 22년 간의 복원을 마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일반에 공개됐을 때 일부 비평가들은 “원작의 20%만 살아남았으며 나머지는 복원자들의 덧칠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9년에 걸친 시스티나 성당의 미켈란젤로 작품 ‘천지창조’ 복원은 얼룩덜룩한 빈칸이 남아있는 초라한 모습이라며 정반대의 비판을 받았다. 문화재 복원의 선진국이라는 유럽에서조차 복원 문제는 이처럼 쉽지 않다. ‘보존이냐, 복원이냐’를 둘러싼 논란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탈리아 문화재 보존 관련 학자 3명이 왔을 때 제가 물어봤어요. 그쪽에선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총싸움까지 일어날 정도로 복원과정을 격렬히 논의한다고 하더군요.”(김덕문 조사원)

아직까지 복원 방향은 정해진 것이 없다. 보수정비팀에서는 유럽 선진국 답사와 전문가 초청, 국제학술대회 개최 등도 계획하고 있다.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해체된 부재는 복원시 대부분 사용된다는 원칙 아래 탑이 해체되고 난 후 결과를 갖고 위원회를 열어서 방향을 설정할 계획”이라며 “아직 6층일지, 9층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전북 익산을 떠나자마자 대통령 탄핵 소식을 접했다. 서울로 오는 길, 봄바람이 불어오는 고즈넉한 사지(寺地)에서 들려오던 망치질 소리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미륵사 탑 최소 2번 무너졌다”

미륵사지 석탑 해체작업이 진행되면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진 비밀들이 풀릴지 기대되고 있다. 탑의 붕괴 원인과 시기, 개축(改築)설, 탑의 높이(9층설과 7층설) 등이 그것이다.

그동안 탑의 붕괴 원인으로는 ‘삼국사기’에 신라 성덕왕(聖德王) 18년(719)에 ‘미륵사지가 벼락을 맞았다(震彌勒寺)’는 기록을 근거로 벼락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해체 과정에서 탑의 내부가 심하게 변형되고 외부도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점 등을 고려, 탑 붕괴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파악도 진행 중이다. 벼락의 흔적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 조사결과 탑의 개축설은 더욱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파악된다. 후백제 견훤시대(922) ‘혜거국사(惠居國師)’의 비문을 보면 ‘미륵사의 개탑(開塔)을 계기로 혜거가 선운사의 선불장에 참석해 단에 올라 설법을 할 때 천화(天花)가 흩날렸다(…特被彌勒寺開塔之…)’고 나와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김봉건 소장은 “후백제 개탑의 기록이 사실인지 의심스러웠는데, 최근 석탑 해체 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사리를 담았던 항아리 조각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개탑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고 말했다.

김덕문 책임조사원도 개축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김 조사원은 “옥개석(屋蓋石ㆍ석탑 위를 덮는 돌)들의 규격이 일정하지 않은 게 제법 있다”며 “무너진 상태에서 다시 쌓으면 규격을 맞추기 힘들다”고 말했다. 일제시대 당시 무너진 것을 포함해 최소 두 번은 무너졌다는 얘기가 된다.

삼국사기 ‘벼락’ 기록도 확인 안돼

“백제시대 원형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질문에 김봉건 소장은 “봉정사 극락전이 고려시대 건물이라고 이후에 전혀 수리가 안된 것은 아니다”며 “백제탑을 수리했다고 해서 백제탑이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부재 자체는 모두 백제시대의 것이기 때문에 1400년의 역사는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출처 : 글 - 산실님블로그

                       사진 - 소구리홈사갤러리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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