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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은 원래 본사 영은사(本寺 靈隱寺)의 이름을 따서 영은산이라고 불리었으나 많은 굴곡의 계곡이 양(羊)의 창자와
비슷해서 많은 인파가 몰려와도 계곡 속으로 들어가면 어디에 그 많은 인파가 있는 지 잘 보이지 않아 마치 양의 내장(內贓) 속에 숨어들어 간 것
같다하여 내장산(內贓山)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이 곳 지명도 내장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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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내장산은 순창군과 경계를 이루는 해발 600~700m급의 기암괴석이 말발굽형의 능선을
그리고 있다.
호남의 금강이라 불리기도 하는 내장산은 예로부터 조선 8경의 하나로 이름나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남원 지리산·영암
월출산·장흥 천관산·부안 변산과 함께 호남 5대 명산으로 손꼽힌다.
내장산은 봄에는 진달래꽃·철쭉꽃·산벚꽃 등으로, 여름에는 울창한
수목의 녹음과 기암괴석으로 형성된 계곡의 시원한 물로, 특히 가을 단풍은 금산사의 봄 벚꽃·변산반도의 여름 녹음·백암산의 겨울 설경과 함께 호남
4경으로 그 이름이 내외로 널리 알려져 있고 겨울의 설경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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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내장산 가까운 마을에 어려움을 모르고 살면서도 자식이 없어 걱정하던 손씨 부부가 있었는데 전국의 명산과 명찰을
찾아다니면서 자식 얻기를 기도하며 불공을 드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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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강원도 금강산에서 기도를 올리던 아내가 깜빡 조는 꿈결에 관음보살이 나타나"너희 정성이 지극하여 내가
한 아이를 내려줄 것이니 행여 한시라도 부처의 고마움을 잊으면 그 아이가 성치 못할 것이니 그리 알고 명심하라" 이르면서 새빨간 고추를
내려주기에 벌떡 일어서 받다가 꿈을 깨었는데, 그로부터 열 달 만에 옥동자를 낳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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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영특하고 건강하게 자랐으며 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손씨 부부는 며느릿감을 찾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허름한 옷차림을 한 스님이 찾아와 평안도에 천생배필인 규수가 있으니 짝을 맞추어 주라 하여 스님이 떠난 후 중매쟁이를 시켜 평안도 땅에 보냈는데
중매쟁이 말에 의하면 스님이 말한 처녀는 가난한 집 규수에다 다리까지 저는 불구의 몸이라는 것이다. 어렵게 얻은 자식을 불구에게 장가 보내라고
한 스님이 원망스러워 손씨 부부는 부처님의 은혜를 잊고 부처님에게 폭언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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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하루 이틀이 지나자 그토록 건장하던 아들이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서 몰골이 곧 죽을상이 되었다. 어느 날
아들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너는 너의 부모와 인연이 닿지 않으니 당장에 집을 나와 전국의 명산대찰을 순례하고 불문에 들어 불자가 되면
새로운 뜻을 이루리라"고 현몽하였다. 날이 밝자 부모님께 고하고 집을 나와서 절을 찾아다니며 불공을 드리고 불경을 외웠다. 몇 달이 지나
"내장산에 가면 네가 득도할 공부방과 네 병을 고쳐줄 약수가 있는데 여기서 무얼 하느냐"는 보살의 꾸중 소리가 들려 벌떡 일어나 그 길로
내장산에 갔으며 공부방과 약수가 함께 있는 곳을 찾아 자리잡고 오직 불경 공부와 불공드리기에만 정성을 다하고 바위틈에서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약수를 받아 마시며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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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스님이 된 젊은이는 백일기도를 결심하고 기도에 전념하면서 백일기도가 끝나자 스스로 느낄 만치 몸이 가벼워졌고
3년이 지난 후에는 당당한 몸집과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에 통달한 득도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전국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칠 생각에 내장산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지금까지 지내던 암자 주변을 거닐던 스님이 한 곳에 이르자 깜짝 놀라 멈추었다. 지금껏 자신이 받아 마시던 약수터에서 얼마
멀지 않은 산기슭에 서너 평되는 산삼 밭이 있었다. 기도와 공부에 전념하느라 몰랐지만 이제 보니 자신은 산삼에서 스며 나오는 약수를 먹고
살아온 것이었으니 이 세상의 덧없는 인연을 단념하고 부처님과의 인연에 몸과 마음을 바친 그에게 이러한 부처님의 은혜가 내린 것임을 새삼 깨닫고
더욱 정진하여 큰스님이 되었다는데 이 산삼 약수터는 지금의 원적암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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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 학습 탐방로 코스 : 거리 (3.6 km), 소요 시간 (1:20분) 일주문 0.9km → 벽련암 1.2km → 원적암
1.2km → 내장사 0.3km → 일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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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선폭포 코스 : 거리 (5.4 km), 소요 시간 (1:40분) 집단 시설 지구 0.5km → 매표소 2.5km → 내장사
2.4km → 금선폭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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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래봉 코스 : 거리 (6.6km), 소요 시간 (4:20분) 일주문 0.9km → 벽련암 1.0km → 서래봉 2.0km →
불출봉1.0km → 원적암1.2km → 내장사0.3km → 일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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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봉 코스 : 거리 (8.2km), 소요시간 (4:20분) 일주문 0.3km → 내장사 1.7km → 용굴 입구 1.0km→
신선 약수 0.5km → 신선봉 1.5km → 까치봉 1.2km → 용굴 1.7km → 내장사 0.3km → 일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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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선 일주 코스 : 거리 (13.8km), 소요 시간 (9시간) 관사 입구 1.0km → 유군치 1.0km → 장군봉
1.0km → 연자봉 1.2km → 신선봉 1.5km → 까치봉 0.9km → 연지봉 0.7km → 망해봉 1.5km → 불출봉 2.0km →
서래봉 2.1km → 월영봉 0.6km → 송이바위 0.3km → 관사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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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망대 코스 : 거리 (3km), 소요 시간 (0:50분) 매표소 2.1km → 케이블카 0.9km →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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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장사
(지방기념물 제 6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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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사는 백제 무왕 37년(636년) 영은조사가 창건한 절로서 원래는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50여
동의 가람을 세워 영은사라고 했다고 한다. 고려 숙종과 조선 명종 때에 전각과 당우를 크게 고쳐 세웠으나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고 그 뒤
정조 때에 다시 일으켜 세웠다. 1925년 본사를 백련암으로 옮겨 백련사라 하고 옛 절터에는 영은암을 두었다가 1938년 지금의 자리에 내장사를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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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력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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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기념물 제 73호 서래봉 중봉 330m 고지에 있으며 원래 내장사란 이름으로 일컬었었는데, 근세에 와서
영은암(현 내장사)이라 부르던 곳을 내장사로 개칭하고 이곳은 백련암이라 이름하였으나 그 후 벽련암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환해 선사의 창건으로 1925년 백학선사가 본전인 극락보전과 요사를 중건하고 선당(호상서림)을 세웠는데 6.25 병화로
1951년 소실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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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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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괴석이 겹겹이 하늘에 솟아 있어 마치 백학이 하늘을 나는 듯한 운치를 주는 백학봉 아래 자리잡고 있는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년)에 여환 선사가 창건하여 백암사라 하였는데 고려 때에 중창되어 정토사로 개명됐다가 조선조 선조 때에 환양 선사가
여기서 법회를 열었을 때 그 설법이 너무나도 감명 깊어 뒷산에 있던 백양이 내려왔다 하여 백양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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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적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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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사 서북쪽 비자나무 숲을 지나 불출봉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이 암자는 고려 선종 3년 (1086년)에 지은
것이다. 인도에서 들여온 열반상은 중국 와불사 것과 예술적 가치가 백중 했으나 1910년에 도난 당했고 현재의 것은 상아로 만든 것으로
북두서면의 석가여래의 열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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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암산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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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전란사에 의하면 백제 시대에 축성하여 고려 시대엔 몽고군을 격퇴했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백제가 신라 고구려를
막던 곳으로 추정된다. 성 둘레는 총 5,028m이며 정유재란 때 당시 별장 윤진이 왜군 소서행장과 싸우다 순절한 곳으로 그 순의비가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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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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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사 634년(백제 무왕 35년)에 숭제 법사가 노령 산맥의 영구산 중턱에 창건하였는데 절 입구에 거북 바위가
있어 구암사라 명명하였다. 조선 현종 시대의 유명한 명유인 노사 기정진 선생의 수도처였으며 또한 백파법사와 동거 명필인 추사 김정희 선생이 이
구암사에서 수학하였었다. 현재 복흥면 도화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양사와 2㎞ 떨어진 백학봉 동편에 자리잡고 있는데 봄철의 벚나무 여름의 숲과
가을 단풍이 좋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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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령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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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봉의 남맥이며 옛 월조암의 주봉으로 내장 9봉 중 가장 낮은 봉우리로서 추령에서 올라오는 달을 감상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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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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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사의 북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암석의 연봉들로서 내장산이 자랑하는 기암괴봉이다. 대웅전의 북쪽으로 둘러서
있는 층암의 장관이야말로 내장산의 대표적인 경관이라 할 수 있다. 암봉(岩峰)의 모양이 마치 농기구인 써레처럼 생겼다 하여 서래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서래봉은 깎아 세운 듯한 기암 단애의 연봉이 약 1km에 걸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데 가을이면 이 자연병풍에 불타는 듯 황홀한
단풍이 물들여진다. 또한 서래봉 아래에는 벽련암터인 고내장과 장군수, 석란정터 등의 명소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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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출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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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의 서북쪽에 있는 높이 610m의 바위 봉우리로서 '불출운하'로 유명하다. 서래봉줄기의 서쪽에 있는 봉우리인데
정상의 절벽 남쪽에 불출암터인 커다란 석굴이 있다. 불출암터 서쪽의 암벽에 "내장풍악(內藏風嶽)"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산정에 서면 신선봉이
마주 바라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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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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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출봉에서 서남간에 뻗어있으며 연지봉 사이에 솟아있는 봉우리를 말한다. 내장산 안쪽으로 먹방이골이 잘 보이며
바깥쪽으로는 용산 저수지와 호남 평야는 물론 맑은 날이면 정상에서 서해를 조망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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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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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출봉에서 서남쪽으로 솟아오른 봉우리로서 이 곳에서 발원하는 내장산 계곡의 물이 서래봉을 돌아 내장호를 이루며
동진강 줄기의 근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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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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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 서쪽 중심부에 2개의 암봉으로 되어있는 내장산의 제2봉으로서 백암산을 연결하는 주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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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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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내장산의 최고봉으로 높이 763m 이다. 정상에서면 입암산과 백암산, 연봉 그리고 내장산 일대의 장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신선들이 놀았다는 금선대가 있다. 또한 이 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전주 경기전의 사고(史庫)에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영정(太祖影幀)을 옮겨 보관했던 용굴(龍窟)이 있어 더욱 유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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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자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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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봉우리가 붓끝 같다고 하여 일명 문필봉이라고도 하며, 이 곳에 제비 명당이 있다 하여 연자봉이라고 하였다. 대웅전
앞에서 연자봉을 바라보면서 글을 쓰면 좋은 문장이 나오며 일류 명사로서 입신출세한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는 8각정의 2층 전망대가 세워져 있고,
이 곳에서 200m 위 지점에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우화정 지구 사이를 운행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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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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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령에서 연자봉 중간에 솟아있는 봉우리를 말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승병대장 희묵대사가 활약했다고 전해지는
험준한 봉우리로서 수목이 울창하다. 산정에는 지휘대가 있고 이것을 장군대 또는
용바위라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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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에 생육하고 있는 단풍나무과 수목(13종) : 당단풍, 좁은단풍, 털참단풍나무, 신나무, 복자기, 중국단풍, 고로쇠, 산고로쇠,
왕고로쇠, 단풍나무, 내장단풍, 아기단풍, 네군도단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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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무 각 처의 산야에 자라며 키가 8m에 달한다. 잎은 마주나며 세 갈래로 얕게 갈라진다. 잎자루는
담홍색으로 가을철에 붉게 단풍이 들고 말린 잎은 염료로 사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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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쇠나무 각처의 산골짜기에 자라며 키가 20m에 달한다. 잎은 마주나며 5갈래로 갈라진다. 잎은
가을에 누렇게 단풍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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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나무 내장산, 대둔산, 백암산에 자라며 보통 키가 10m에 달한다. 잎은 마주나며 5~7개로
갈라지며 가을에 붉게 단풍이 든다. 단풍나무와 유사한 내장 단풍, 털단풍, 아기단풍 등이 내장산에 단풍나무와 함께 자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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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무 전국의 산 속에 자라며 보통 키가 8m에 달한다. 잎은 마주나며 보통 9~11개로 갈라지며
가을에 붉게 단풍이 든다. 당단풍과 유사한 좁은 단풍나무 등이 내장산에 당단풍과 함께 자라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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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新綠) 진달래, 개나리가 암갈색 산을 곱게 물들이고 매화, 산벚꽃까지 한몫
거들기 시작하면 내장산은 어느덧 꽃밭으로 변한다. 또한 추령교에서 회룡 마을까지의 산벚꽃의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처럼 너무 아름다워 꼭 권하고
싶은 풍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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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綠陰) 짙푸른 녹음의 계절 700여 종의 자생 식물이 빈틈없이 들어찬 내장산은 차라리 대형 녹색
장막이다. 그래서 여름 내장산의 별칭은 하청음(夏淸陰)이다. 금선폭포와 도덕폭포의 시원한 물줄기는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상쾌해 더위를 가시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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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丹楓) 남녘 제일의 가을산으로 단풍놀이의 대명사로 꼽히는 내장산은 30
여종의 단풍나무들이 제각기 독특한 빛깔로 울긋불긋 빨갛게 물들어 탐방객들을 반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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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雪景) 눈이 많이 내리는 곳으로 유명한 내장산은 한 폭의 한국화(韓國畵)를
연상케 하며 눈구슬이 바람에 날리어 청아한 소리를 낸다 해서 내장산의 겨울을 동설주(冬雪株)로 일컫는다. 내장산의 겨울 설경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온화한 느낌을 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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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용굴암지 신선봉의 북쪽 기슭에 있는 용굴암지는 1592년 부터 1593년 까지
전주 경기전의 조선왕조실록과 이태조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용굴은 넓이 15미터, 높이 1.5미터∼ 2미터이며 내부의 깊이는 10미터쯤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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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의 천연기념물 내장산에는 천연기념물이 많이
있다. 천연기념물이란 우리 문화를 창조하게 한 국토의 고유하고도 중요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희귀한 동물, 식물, 광물과 아름다운 경승지 등이
그 대상이다. 이에 따라 내장산비자림(천연기념물 제 153호), 내장산굴거리나무(천연기념물 제 91호), 내장산까막딱다구리(천연기념물 제
242호), 내장산검독수리(천연기념물 제 243호) 등은 우리들의 사랑과 관심으로 보호돼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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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장산
비자림 (천연기념물 제 15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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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 일주문에서 시작하여 내장사에 다다르면 오른쪽으로는 원적계곡으로 진입하고, 왼쪽으로는 신선계곡으로
향한다. 90여 그루에 달하는 내장산의 비자나무는 대부분 원적계곡 북쪽의 산에서 자라고 있다. 20여 그루는 원적암계곡 남쪽 기슭 월출봉 및
습지에 웅장한 숲을 이루고 있으며, 나머지 70여 그루는 서래봉과 월출봉 낮은 지역의 잡목 숲에서 자라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가장 북쪽에
살고 있는 내장산의 비자나무는 늘 푸른 나무로 특히 가을이 지나면 쉽게 눈에 볼 수 있다. 특히 내장산의 비자나무는 그 나이가 760년 이상으로
동양에서는 가장 오래된 나무로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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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
굴거리나무 (천연기념물 제 9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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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사 일대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굴거리나무는 가지가 굵고 잎이 가지 끝에 무더기로 더부룩하게 나 있어 매우
이색적인 정취를 풍긴다. 봄에 황록색의 작은 꽃이 피며 열매는 타원형이며 11월 사이에 검푸른 빛으로 익는다고 한다. 굴거리나무는 한때
철쭉과에 속하는 늘 푸른 떨기나무 즉, 만병초라 불려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용도는 정원수와 약용으로 쓰이는데 특히 잎은 신경통 약제로 알려져
간혹 따 가는 사람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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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
까막딱다구리 (천연기념물 제 24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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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 까치봉 남쪽 및 노거수에서 1974년에 발견된 까막딱다구리는 까마귀나 크낙새와 비슷한 데, 몸 전체가
검은색이며 광택이 난다. 수컷은 머리 위와 목뒤가 붉고, 암컷은 머리 위에 붉은색이 약간 엿보인다. 주로 까막딱다구리는 큰 나무가
무성한 숲 속에서 살며 몸을 수직으로 하여 나무에 앉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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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
검독수리 (천연기념물 제 24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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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내장산 까치봉 북쪽 절벽에서 발견된 검독수리는 매과에 딸린 새다. 검독수리는 암수가 같은 빛깔이며
등쪽은 짙은 갈색에 남색 광택이 난다. 또한 머리 위는 갈색이고, 윗목과 뒷목은 노란색을 띤 붉은 갈색이며, 꼬리의 밑부분 역시 갈색인데,
불규칙한 회색 띠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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