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이 숨쉬는 산행지

월악산 - 유물과 사진 갤러리 ( 충북 제천, 충주)

창현마을 2005. 9. 20. 11:52

 

960m 고지에 있는 헬기장에서의 주봉의 수직 암벽 부분

-사진에서보다 실제로는 그위용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갖게하는 곳이다

 

송계리에서 올려다본 영봉과 주봉의 서쪽 능선

 

덕주사에서 왼쪽편 사다리설치 구간으로 오르다 바라본 주봉의 모습

 

월악리에서 바라다본 월악산의 위용

 

산성을 복원해 놓은 모습

 

근래들어 새로 지은 덕주사의 대웅전

 

 

 

덕주사 마애불

-우리나라의 마애불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부처님의 모습이

매끄럽게 조각되어지지 못한 것같다(개인느낌이지만...)

 

 

 

 

 

 

 

 

서촉편 월악나루와 충주호의 모습이 그림처럼 달려드는 곳임에도

늘상 사진의 포커스를 제대로 잡기가 어려운 곳이다

 

보물 6점

사자빈신사지석탑(94호)
미륵리오층석탑(95호)
미륵리석불입상(96호)
월광사원랑선사탑비(360호)
덕주사마애불(406호)
신륵사삼층석탑(1296호)

시도유형문화재 5점

중원미륵리석등(19호)
중원미륵리삼층석탑(33호)
김세균판서고가(88호)
신륵사극락전(132호)
덕주사약사여래입상(196호)

시도기념물 3점

황강영당및수암사(18호)
제천덕주산성(35호)
중원미륵리도요지(100호) 

시도민속자료 및 사적 2점

한수명오리고가(5호)
중원미륵리사지(317호)

천연기념물

산양(217호)
하늘다람쥐(328호)
수달(330호)
망개나무(337호)
검독수리(243호)
원앙(327호)
참매,황조롱이, 새매(323호)
올빼미,수리부엉이(324호)

덕주사 마애불

마의태자의 누이인 덕주공주가 세운 절이라고 전해지는 월악산 덕주사의 동쪽 암벽에 새겨진 불상이다. 거대한 화강암벽의 남쪽면에 조각한 불상은 전체 높이가 13m나 되는데, 얼굴부분은 도드라지게 튀어나오게 조각하였고 신체는 선으로만 새겼다.
민머리 위에는 반원형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솟아 있으며, 살찐 얼굴에는 눈,코,턱 등이 강조되어 있다. 이와 같이 얼굴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은 고려시대의 거대한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이다. 목에 있어야 할 3줄의 삼도(三道)는 가슴 위에 선으로 조각하였다. 선으로 조각한 살찐 신체는 인체의 조형적 특징이 무시된 채 기이함을 보인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축 늘어져 힘이 없으며 선으로 된 옷주름 역시 생동감이 떨어진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었고, 왼손은 손등을 보이고 있다. 좌우로 벌린 발은 지나치게 크고 발가락도 굵고 길게 표현되었으며 양 발 아래에는 연꽃잎을 새겨 대좌(臺座)로 삼았다. 고려 초기의 거대한 불상 조성 추세에 힘입어 만든 것으로, 살찐 얼굴과 하체로 내려갈수록 간략해진 조형수법, 입체감이 거의 무시된 평면적인 신체 등은 크기에 비해 불상을 졸렬하게 만들고 있다.

 

미륵리사지 석불입상

고려 초기 이 부근에서 많이 만들어진 일련의 커다란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을 같이하는 석불입상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말 마의태자가 나라의 멸망을 비통하게 여기며 이곳까지 와서 불상을 만들고 개골산으로 들어갔으며, 그 여동생은 덕주사마애불(보물 제406호)을 만들었다고 한다.
모두 5개의 돌을 이용하여 불상을 만들고 1개의 얇은 돌로써 갓을 삼았다. 둥근 얼굴에 활모양의 눈썹, 긴 살구씨 모양의 눈,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은 고려 초기 커다란 불상의 지방화된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신체는 단순한 옷주름의 표현이라든가 구슬같은 것을 잡고 있는 손의 묘사 등에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간략함을 느낄 수 있다.
이 불상의 대담하고 거대한 모습으로 보아 새로 일어난 국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신륵사 극락전

신륵사는 월악산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진평왕 4년(582) 아도가 지었다고 하나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그 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원효가 고쳤다고 하며, 조선 선조(재위 1567~1608) 때 사명대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륵사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의 건물이다. 건물의 바깥쪽 벽에는 여래상을 그려 장엄하게 하였으며, 내부에는 천장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불화가 있다. 중앙에는 용 등으로 장식하여 내부를 세련되고 우아하게 하였다.
이곳에 모시고 있는 목조 아미타불좌상은 조선 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신륵사 3층석탑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하나씩 본떠 새겼고, 탑신에서도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층마다 4단이며, 빗물을 받는 낙수면은 경사를 약하게 두었고, 네 귀퉁이에서 약간씩 치켜 올려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 등이 올려져 있으며, 머리장식부의 무게중심을 지탱하기 위한 쇠꼬챙이(찰주)가 뾰족하게 꽂혀 있다.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는 고려 전기의 탑으로, 특히 이처럼 머리장식이 잘 남아있는 예는 드문 편이며, 각 부재를 만든 솜씨도 세련되어 보인다.
1981년 탑을 해체하여 복원할 때 기단 내부에서 흙으로 빚은 소형 탑 108개와 사리함 조각이 발견되었다.

 

중원미륵리사지

고지대에 위치한 미륵리사지는 석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석굴사원터이다.
거대한 돌을 이용해 석굴을 쌓은 후 불상을 모셨으며, 위에 목조건물이 있었던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조사결과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연대를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추정한다. 석불입상(보물 제96호)·5층석탑(보물 제95호)·석등·당간지주 등 중요한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금강산으로 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황강영당

조선 주자학의 대가인 송시열(1607~1689) 선생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인 권상하(1641~1721)와 권상하 선생의 제자인 한원진(1682~1751), 윤봉구(1681~1767), 권욱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영당과 수암 권상하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송시열 선생은 인조 11년(1633) 문과에 급제하여 학문적 명성을 떨쳤고 후에 효종이 추진하던 북벌계획의 핵심인물로 부상되기도 하였다.
권상하 선생은 그의 스승인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죽자 그의 유품을 거두고 유언에 따라 화양동에 만동비와 대보단을 세웠다. 그 뒤 숙종이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우의정과 좌의정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는 16세기 이율곡과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계보를 이으며 크게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영조 2년(1726)에 세웠고 다음해에 황강서원으로 승격되었는데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황강영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83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것이다.
황강영당은 앞면 2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이곳과 담장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 수암사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덕주산성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있다.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 때문에 차단성의 기능을 지닌 이 성은 고려 고종 43년(1256)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또 조선 말기에는 명성왕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둘레가 32670척(9800m)에 이르렀던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동문,북문의 3개 성문이 남아 있다. 남문은 동창으로부터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무지개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으로 되어 있고, 좌우를 막은 성벽은 내외 경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다. 덕주골 입구에 있는 동문은 남문과 비슷하며, 새터말 민가 가운데 있는 북문은 내외에 홍예가 있으며 홍예 마룻돌에는 태극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내외 5겹의 성벽이 있는데 축조연대가 각기 달라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사자빈신사지석탑

빈신사터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탑으로 상하 2단으로 된 기단 위에 4층의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기단은 글이 새겨져 있어 탑의 조성 경위를 알 수 있으며 위기단은 사자 4마리를 배치하여 탑신을 받치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네 모서리에 한마리씩 배치한 사자의 안쪽 공간에 비로자나불상을 모셔 두었다. 앉은 모습의 비로자나불상은 특이하게도 두건을 쓰고 있으며 표정이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의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으로 이 밖에도 몇 기의 탑이 더 전해지고 있다. 현재 탑신에는 지붕돌이 4층까지 남아 있는데, 아래기단에 있는 글을 통해 원래는 9층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고려 현종 13년(1022)에 만들어진 이 탑은 연대가 확실하여 각 부의 구조와 양식, 조각수법 등 다른 석탑의 조성연대를 추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탑이다.

 

미륵리5층석탑

이 곳에는 고려시대의 석불과 석굴이 만들어졌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앞쪽에 석등과 더불어 이 석탑이 남아 있다.
석탑은 기단부(基壇部)의 아래부분이 땅 속에 파묻혀 있어서, 그 구조가 어떤지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드러난 부분은 자연석에 가까운 네모난 돌로 특별하게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그 위로 기단의 맨윗돌이 올려져있다. 탑신(塔身)은 1층 지붕돌이 2장일 뿐 몸돌이나 다른 지붕돌은 모두 1장의 돌로 되어 있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몸돌의 넓이에 비하여 좁은 기둥을 모서리에 새겼다. 지붕돌은 급격하게 좁아져 석탑 전체의 균형과 미관을 손상시키고 있다. 지붕 밑면의 받침은 5단이지만 추녀가 짧아서 6단인 것처럼 보인다. 처마는 수평이고 지붕돌의 경사는 매우 급한데 귀퉁이의 치켜올림은 거의 없는 편이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는데, 노반은 6층 지붕돌로 보일 만큼 큼직하고, 복발은 반원 모양이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의 중심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긴 쇠꼬챙이모양의 찰간(擦竿)이 남아있다.
5단의 지붕돌 밑면받침과 직선의 처마는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인데, 지붕돌의 급경사와 형식적인 기둥새김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월광사원랑선사탑비

충청북도 제천군 한수면 동창리 월광사터에 전해오던 탑비로, 192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인 원랑선사(?~866)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이다.
원랑선사는 문성왕 18년(856) 당나라에 유학하여 11년간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다 귀국한 뒤 월광사에 머물렀다. 68세로 입적하자 헌강왕이 '대보광선(大寶光禪)'이라는 탑명을 내려, 김영에게 비에 새길 글을 짓게 하였다. 글씨는 구양순체의 해서체로 순몽이 쓴 것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거북받침은 네 발이 몹시 작고 짧은 목과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 후기에 나타나는 형식화된 조형이다. 머릿돌에 새긴 조각은 매우 사실적이다.
전체적으로 탑비의 머리·몸·받침 각 부분의 비례감이 훌륭한 비로서, 단아하면서도 안정된 느낌을 준다. 탑비는 원랑선사가 돌아가신 후 진성여왕 4년(890)에 세워졌다.

 

덕주사약사여래입상

원래 정금사 절터라고 전해오던 곳에 있던 불상으로, 충주댐 건설로 1983년 4월 현위치로 옮겼다. 부분적으로 닳았을 뿐 비교적 완전한 모습에 속한다. 특히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몸통의 밑부분이 약간 파손되었을 뿐 옷주름 등은 상태가 양호하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낮고 작은 머리묶음이 있으며, 얼굴은 길쭉하지만 풍만하다. 양족 눈은 가늘고 긴 듯 하나 닳아서 구분하기 어렵고 양쪽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형식적으로 표시하고 가슴 부분이 널찍하게 드러났으며 왼쪽편에 주름이 몰려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고 손바닥을 밖으로 드러내어 엄지에 새끼 손가락을 구부려 대고 있으며, 왼손은 수평으로 배 아래 부분까지 들어 약그릇을 받들고 있으므로 약사여래불임을 알 수 있다.전체적으로 몸통에 비해 머리가 크며 대좌(臺座)는 별도로 만들어 양 발만을 윗면에 조각하고 위로 몸통을 얹고 있다.

 

미륵리도요지

요지는 자기나 기와, 그릇들을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미륵리 가마터는 중원 미륵사터와 가까운 거리인 점말마을의 높은 산 동남쪽 경사면에 17세기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친 여러시기의 가마가 한 곳에 밀집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4기의 가마터와 1기의 퇴적층, 1곳의 작업장이 확인되었다. 가마구조는 계단식 오름칸 가마로 보존상태가 잘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청화백자, 철화백자, 초문철화백자 등이 있다.

미륵리 가마터에서는 20세기전반의 백자 가마와 일본식 가마가 동시에 발굴되어 한국과 일본의 도자문화 교류상황 파악은 물론 우리의 전통 가마축조 방법과 자기 생산양상 파악 등 도자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김세균판서고가

조선 순조(재위 1800~1834) 때 이조판서를 지낸 김세균(1812~1879)이 살았던 옛집이다. 원래는 한수면 북노리에 있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안채는 충주로 옮겨 지었고 사랑채는 이곳으로 옮겼다.
ㄴ자 모양으로 꺾이는 부분인 중앙에 부엌을 놓아 구들을 시설하고, 앞면 끝에 대청을 배치하였다. 대청은 문을 달아 마루방으로 꾸몄고, 집의 맨 뒤쪽에 사랑방을 배치하여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한 점이 특이하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잘 다듬은 네모 주춧돌과 각 방문 밑에 나무로 설치한 머름 등이 이 집의 격을 높여준다.

 

미륵리석등

월악산을 바라보며 서 있는 괴산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96호)과 괴산 미륵리오층석탑(보물 제95호)의 중간에 놓여 있는 석등이다.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상.중.하로 이루어진 3단의 받침을 마련하여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올린 후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한 돌로 이루어졌으며,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둘렀다. 가운데 기둥은 적당한 높이에 간결한 모습이다. 윗받침돌에는 아래받침돌과 대칭되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불빛이 퍼지도록 4면에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려졌다. 꼭대기에는 8각의 낮은 받침 위에 보주(寶珠:꽃봉오리모양의 장식)을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함께 서 있는 석불입상, 5층 석탑과 함께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미륵리3층석탑

석굴이 있는 미륵사터 경내에서 동쪽으로 500m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고려시대 3층 석탑이다. 이곳이 원래의 터로 추정되는데 절터와 멀리 떨어진 곳에 왜 탑을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위·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하여 2층 몸돌의 높이가 많이 줄어들었고,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시대가 고려로 내려옴으로 인해 지붕돌 밑면받침 수가 4단으로 줄어드는 등 후대의 양식이 나타난다. 대체로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을 갖추었다.

 

한수명오리고가

ㄱ자 모양의 안채와 ㄴ자 모양의 사랑채가 거의 ㅁ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윗방 밖으로 굴뚝을 두어 부엌에서 땐 불의 연기가 안방과 윗방을 지나 이 굴뚝으로 빠지게 되어 있다. 이런 구조는 이 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랑채는 지붕은 덧서까래를 사용하여 특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안채의 집 구조는 일반적인 3칸 툇집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으며 , 민가 가옥 구조의 발전 과정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출처- 일부사진 ;한국의산하갤러리발췌

글- 여진님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