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머무는 여행지

개성관광

창현마을 2005. 9. 6. 00:21

 

 

"우리나라의 3대 폭포를 아십니까?"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한 어른이 물었다. 주위에서 여러 사람들이 말을 꺼냈다. "금강산의 구룡폭포..... 개성의 박연폭포....." 질문을 내신 어른이 마지막으로 거들었다. "설악산의 대승폭포지요.

 

저는 오늘로서 이 3대 폭포를 다 보았습니다.

이제 가슴에 회한이 없습니다." 2005년 8월 26일 오전 10시, 개성직할시 개성시 박연리 천마산 기슭에 있는 박연폭포 앞에서 벌어진 한 광경이다.

 

 

 

과연 3대 폭포중의 하나였다. 높이 38.5미터, 폭 1.5미터의 이 박연폭포는 마침 간밤에 내린 비 때문인 듯 더욱 풍부한 수량으로 정말 시원하게 물줄기를 쏟아 내리고 있었다.

 

흰 물보라는 폭포앞에 파여진 지름 40여 미터의 거대한 물웅덩이인 고모담(姑母潭) 주위를 혼통 허옇게 장식하면서 남에서 찾아온 첫 공식 관광단의 얼굴에 서린 열기를 식혀주고 있었다.

 

실향민들이 대부분인 관광단의 일진은 분단이후 처음으로 고행을 찾는 감격에, 처음으로 박연폭포를 본다는 흥분에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는데, 폭포를 보는 순간 모두다 속이 다 시원해진다고 입을 모으신다.

 

고모담(姑母潭)은 물이 매우 맑고 투명하여 마치 에메랄드를 보는 것 같다.

일찍이 명유 서경덕(徐敬德)과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이른바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알려진 박연폭포,

 

그 폭포 앞 큰 반석인 용머리 위에는 황진이가 머리채를 풀어서 휘갈겼다는 이태백의 싯귀 '비류직하삼천척 의시은하락구천(飛流直下三千尺 疑視銀河落九千, 날아흘러 3천 척을 떨어지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내리는 것 같구나)'가 새겨져 있다.

 

이 폭포 옆으로 난 산길을 돌아 올라가면 북문이라는 성문을 낀 대흥산성이 나오는데, 이 성은 둘레 약 10킬로미터로 고려 시대에 외적의 침입 때 피난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

 

그 북문에서 폭포를 내려다보니 폭포위에 커다란 물웅덩이가 있고, 그 웅덩이에 큰 돌이 박혀 있다. 이 물웅덩이가 그 옛날 이 곳에 들른 박씨성을 가진 진사가 용왕의 딸에 이끌려 물에 들어가 숨졌다는 전설이 있는 곳,

그래서 이 폭포의 이름이 박연폭포라고 하는데, 폭포의 물이 떨어져서 생긴 고모담이란 물 웅덩이는 박진사의 어머님이 아들을 찾다가 들어가 숨진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아무튼 박연폭포를 가장 좋은 시정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것도 분단 60년 만에 처음으로 찾아가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서 남북분단의 벽을 허문 현대라는 기업의 힘과 노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아침 6시까지 경복궁 주차장에 모여 간단한 기념식과 함께 출발한 개성시범관광단, 모두 14대의 관광버스에 나눠 탄 우리들 500여명의 시범관광단은 자유로를 거쳐 7시를 좀 넘어 남측 출입사무소에서 출국수속을 마친 뒤 오전 8시에 군사분계선을 통과해서 약 30분 동안 북측 출입수속을 마쳤다.

 

수속이라고 해야 특별한 것은 아니고, 다만 일간신문이나 정치적 내용이 들어있는 서적 등은 반입을 미리 피하는 것이며, 휴대폰은 모두 미리 버스에 맡겨놓고 짐검사를 받아 모두 무사히 통과되었다.

 

북측 요원들의 태도도 금강산 관광 길에 만났던 때보다는 사뭇 점잖아 졌다는 것이 중평이었다.

 

그리고 불과 몇 분을 더 가니 한창 공사가 진행중인 개성공단이 나오고, 거기서 일하는 남측 근로자, 북측근로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공단을 지나자 곧바로 개성이다.

 

절 멀리 송악산 밑에 그림같이 누워있는 개성, 시가지는 조용하고 시내 중심가에는 전통형식의 건물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며, 마침 날이 맑아서인지 더욱 깨끗하게 보인다.

 

 

개성거리는 누구의 표현처럼 시대극에 나오는 무대 같았다. 1950~60년대를 연상시키는 길거리는 허름한 기와집과 4~5층 아파트들이 줄지어 늘어선 가운데, '고기 남새', '리발관', '조선옷', '상점' 같은 낡은 간판이 걸려있다.

 

 15층 짜리 아파트도 보였다. 출근시간이 지나 비교적 한가했지만 일부 시민들은 관광객을 태운 차량을 향해 손을 흔들기도 했다.

 

옷차림은 국민복 스타일에다가 이따금씩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한복 차림. 인구 30만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우리의 중소도시에 비해서는 너무 한적하고 조용했다.

 

기와집들에는 대부분 텃밭이 붙어 있었다. 채소를 심어놓은 모습이 정겹게 보인다.

 

관광단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 우리는 먼저 박연폭포를 보고, 다른 팀은 시내 관광, 또 다른 팀은 왕건왕릉과 공민왕릉을 먼저 보는 식이다.

그래서 우리가 박연폭포를 처음 본 남측 관광단이 된 것이다.

 

우리는 개성시내에서 가장 큰 전통건물인 통일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종업원들은 모두 한 복 차림인데 많은 손님들인데도 민첩하게 접대를 하는 모습이었다.

 

점심은 개성식 음식으로 준비된 11첩 반상, 곧 10여가지 반찬이 뚜껑이 있는 유기 그릇에 담겨 한 사람 앞에 하나씩 나온다.

 

음식은 깔끔하고 맛도 정갈했다. 계란과 고등어, 약밥에다가 된장찌개, 북어채 볶음, 오이소백이, 도라지, 조랑떡국 등 나물위주이지만 상큼한 맛이 있었다. 테이블마다 북한의 소주와 맥주를 놓아 한잔씩 마시도록 했다.

 

 

 

실향민들의 화제는 변해버린 고향의 모습에서부터 음식으로 마구 넘나든다.

 

“개성 음식으로는 개성만두와 보쌈김치, 보쌈만두와 엿물로만 만드는 경단이 최고지. 그리고 조랑떡국 알지? 정몽주 죽인 이방원이 미워서 만든 거야. 조랑떡은 떡살을 나무칼로 잘라내 만드는데 그게 이방원의 목을 자르는 것 아니겠어.”

 

"저 앞에가 원래 미나리깡이었는데, 다 변했네."

 

"을지로 입구에서 옛날 개성상회라는 인삼도매상을 하던 개성분들이 옛말에는 정말 대단했는데, 요즘에는 어떻게 되셨는지..."

 

오후에 선죽교를 방문하자 얘기는 더욱 활발해 진다. 얕은 담장 너머로 시가지쪽을 바라보며 말이 끝을 잇지 못한다.

 

"저 쪽에 내가 다니던 학교가 있었는데?"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가 저거야, 선죽 국민학교. 지금은 선죽 제1중학교가 됐네…”

 

 

가장 인기를 모은 것은 역시 박연폭포와 선죽교였다. ‘정몽주 선생의 핏자국’으로 전해지는 붉으스레한 자국들을 뒤에 놓고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길이 6.67m, 폭 2.54m 규모의 작은 돌다리는 한 가운데에 돌로 된 난간이 걸쳐져 있는데, 정몽주의 후손이자 개성유수였던 정호인이 1780년에 사람들이 그 곳을 밟고 다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네 개의 돌을 세운 때문이라고 한다.

 

선죽교 주위에는 하마비와 읍비 등 비석이 여러 개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표충비각이 있는데, 이 속에는 커다란 귀수가 받치고 있는 정몽주 선생을 기리는 표충비 등 두 개의 비석이 있다.

 

한 노인은 “나라에 큰일 이 터지려고 하면 이 비가 울었다고. 내 어릴 적에도 울었는데, 그러고 전쟁이 났지 아마?”며 비석의 영험을 증언했다.

 

그런 만큼 귀수의 머리부분은 까맣게 손때가 묻어 있었다.

 

 

 

그런 선죽교에 비하면 고려시대 성균관이었던 고려박물관을 보는 느낌은 덜 하리라,

 

그러나 실제로 문화재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이 고려박물관이 괜찮은 볼거리이다.

 마당에 들어서니 높이 31m의 은행나무 두 그루와 천년세월을 견뎌온 느티나무가 먼저 인사를 한다. 그 세월이 정지된 분위기가 무척 좋았다.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에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개칭하면서부터이다.

 

충숙왕대인 1308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다.

성균관은 요즈음으로 치면 대학이므로 조선시대에는 대성전(大聖殿)과 동무(東)·서무(西)·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을 갖고 있었는데, 고려시대에도 이런 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건물들에는 유명한 고려청자를 비롯해 고려시대의 금속, 석조문화재, 민속문화재 등이 차례로 진열돼 있는데, 서울에 비해서 그리 눈에 띄는 것이 많지 않다.

 

그것은 원래 개성박물관에 있던 유물들을 625전쟁이 나기 전인 1949년, 38선에서 긴장상태가 감돌자, 서울 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함으로서 개성에는 별반 특별한 유물이 남아있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나 석조문화재는 옮길 수가 없었기에 몇 점이 남아있다. 지금 고려박물관의 왼쪽으로 나가면 몇 개의 탑이 서 있는데, 높이 8.64미터에 이르는 큰 탑의 4면을 돌아가며 부처님 공양하는 모습을 부조로 새긴 헌화사 7층 석탑과, 높이 4미터의 헌화사비, 몸돌과 지붕돌만 남아있는 흥국사 석탑 등은 남쪽에서는 보지 못하는 독특한 방식과 힘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감동을 준다.

 

모두 고려왕실이 정성을 들여 만든 것으로 북한의 국보로 지정돼 있는 명품들이다.

 

고려박물관까지를 보고 나니 어느 덧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아쉬움 속에 다시 시내를 가로질러 개성공단에 가서 현장을 잠깐 돌아본 뒤에 북측 출입사무소 쪽으로 나왔다.

 

거기서부터 우리 쪽 출입사무소를 통과하기까지 다시 한 시간, 그리고는 자유로를 거쳐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꼭 임진강 어디 잠깐 다녀온 듯한 느낌인데, 고향을 두고 온 분들에게는 반세기가 더 지난 것이다.

 

그전까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개성관광, 창 옆으로 북한 주민들을 보며 그들과 손을 흔들 수 있었던 것은 금강산 관광에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느낌이다.

 

금강산 관광이 북한 주민들이 배제된 가운데 일방적으로 보고 오는 것이라면 개성관광은, 직접 북한의 도시 한가운데에 들어가 주민들 사이에서 그들의 얼굴과 표정을 보며, 그들의 눈동자와 교감을 하며 북한을 보는 것이어서, 과거에 비할 수 없이 발전되고 개방된 모습이다.

 

첫 손님들을 맞아 관광지 곳곳에는 면세매점이 설치돼 어여쁜 북쪽아가씨들이 친절하게 판매를 하고 있었다. 가격을 물으면 "네 달러입니다" "스물 달러입니다" 등 한자식이 아닌 우리 식으로 가격을 말해 재미있기도 했다.

 

출입국 수속에서도 여유가 보였다.

북측 출입관리지대를 넘으면서 북측은 우리가 탄 버스에서 누군가가 카메라로 촬영했다며 누구인지를 밝히라고 요구하다가 그냥 조용히 넘어갔다. 이것만해도 큰 발전이다.

 

 북한의 개방이 북한 주민들에게도 그만큼 확산되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휴전선을 넘어 개성에 가서 북한주민을 옆에서 만나면서 돌아가신 장인 어른이 생각이 났다. 함경도 북청이 고향이신 장인어른은 1.4후퇴 때 고향을 나오면서 부인과 아들을 함께 데려나오지 못했다.

 

북에 남겨둔 가족이 그리워 남북회담 소식만 들으면 눈물을 흘리시던 장인어른은 현재와 같은 북한과의 교류는 꿈도 꾸지 못하고 고향에 둔 가족이 어떻게 되었나 그리워하시다가 벌써 20여 년 전 유명을 달리 하셨다.

 

그 어른이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다른 식구들보다 먼저 개성시범관광에 다녀온 복을 누리면서 새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식견에 경탄과 감사의 염을 금할 수 없다.

 

이번 시범관광에서 관광객 한 명이 낸 돈은 19만5000원. 당일관광으로는 무척 비싼 가격이다.

 관광을 신청하신 분들이 실향민이자 노인들이 대부분인 것을 감안하면 그들이 앞으로 모두 개성을 관광할 수 있도록 북측에서 전향적인 결정이 있으면 좋겠다.

 

현재 북측은 관광비용으로 한 명당 150달러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현대아산측은 본 관광 때는 관광 비용을 더 낮추도록 협상을 하겠다고 한다.

 

이런 협상이 잘 마무리돼 9월초의 시범관광 이후 본관광에서 보다 많은 실향민들이 고향땅을 밟는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출처 : 하늘님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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