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명찰 순례

미황사 ; 전남 해남 - 달마산

창현마을 2005. 9. 2. 22:35

 

 

   <  달마산 미황사  -  전남 해남  >

 

 

 

 

 

 

 

 

 

 

 

 

 

 

 

 

 

 

 

 

 

 

 

 

 

 

 

 

 

 

 

 

 

 

 

 

 

 

 

 

 

 

 

 

 

 

 

 

 

 

 

 

 

 

 

 

 

 

 

 

 

 

 

 

 

 

 

 

 

 

 

 

 

 

 

 

 

 

 

 

 

 

 

 

 

 

 

 

 

 

 

 

 

 

 

 

 

 

 

 

 

 

 

 

 

 

 

 

 

 

 

 

 

 

 

 

 

 

 

 

 

 

 

 

 

 

 

 

 

 

 

 

 

 

 

 

 

 

 

 

 

 

 

 

 

 

 

 

 

 

 

 

 

 

 

 

 

 

 

 

 

 

  
 달마산 미황사  1



  미황사는 위도상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해 있는 절입니다.
 1692년(숙종 18)에 건립된 <미황사사적비(美黃寺事迹碑)>에 기록된 창건 연기 설화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8년(749)에 사찰이 창건되었다고 하니 천년고찰(千年古刹)이라 할 수 있는 매우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또한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수려한 달마산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사찰입니다.





< 미황사의 창건 >

「동국여지승람」권35 영암군 산천조(靈巖郡 山川條)를 보면 미황사의 창건주와 창건 시기, 그리고 고려후기 미황사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1692년(숙종18)에 민암(閔暗,1634-1692)이 지은 「미황사 사적비」(美黃寺 事迹碑)에는 미황사의 창건 연기설화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경덕왕 8년(749) 홀연히 한 석선(石船)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獅子浦口)에 와서 닿았다고 한다 배안에서 천악범패(天樂梵唄)의 소리가 들리자 어부가 살피고자 했으나 배가 번번히 멀어져 갔다.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이를 듣고 장운(張雲)·장선(張善) 두 사미(沙彌), 촌주(村主) 우감(于甘), 향도(香徒)100인과 함께 목욕제계하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비로소 석선이 해안에 닿았는데, 그 곳에는 주조한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서 있었다. 그리고 배 안을 살피니 「화엄경」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문수보살 및 40성중(聖衆), 16나한과 탱화 등이 있고 금환(金環)과 흑석(黑石)이 각 한 개씩 있었다.
향도들이 경전과 부처님 상을 해안에 내려놓고 봉안할 장소를 의논할 때 흑석이 저절로 벌어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문득 커졌다.
 이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金人)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優塡國, 인도)왕으로서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경상(經像)을 모실 곳을 구하고 있는데, 이곳에 이르러 산 정상을 바라보니 1만불(一萬佛)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소에 경을 싣고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經)을 봉안하라."고 일렀다.
 이에 의조화상이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가다 처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산 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누우며 사찰을 창건하니 곧 통교사(通敎寺)요, 뒤에 누워 죽은 골짜기에는 미황사를 짓고 경과 상을 봉안했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취한 것이고, '황'은 금인(金人)의 황홀한 색을 취한 것이다.」

 이와 같이 『동국여지승람』과 「미황사사적기」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미황사는 경덕왕 8년(749)에 의조화상이 창건하여 화엄경, 법화경을 중시하며 여러 불상을 모신 사찰로 헤아려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창건 설화는 곧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 고려시대의 미황사 >

 고려시대에 들어와 지원년간(至元年間)(1264~1294)에 남송의 달관(達官), 군자들이 미황사에 내왕하기도 하였습니다. 『동국여지승람』영암군(靈巖郡) 산천조(山川條) 달마산(達摩山)에 보면 「고려 때 승려 무외(無畏)의 記에 …(전략)… 그 암자(도솔암) 북쪽에는 서굴(西窟)이 있는데, 신라 때 의조화상이 비로소 붙어 살면서 낙일관(落日觀)을 수리하던 곳이요, 서쪽 골자기에는 미황사(美黃寺)·통교사(通敎寺)가 있다. 지원 신사년 겨울에 남송의 큰 배가 표류해 와, 이 산 동쪽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산을 가리키면서 주민에게 묻기를, "내가 듣기에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 하는데 이 산이 그 산 아닌가."하므로 주민들이 "그렇다"하였다. 그 고관은 그 산을 향하여 예를 향하고, "우리나라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 생장했으니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가 상주할 땅이다."하고 그림으로 그려갔으니 위대하다. 이 산이여, 어찌 매우 높고 빼어난 모양이 산과 바다의 아름답고 풍부함을 다 했을 뿐이랴. 그 성적과 영험한 자취도 많도다. 또 외국인들까지도 우러르고 공경함이 저와 같다.」고 합니다. 고려후기에 미황사가 있는 달마산은 중국인들에게도 영험한 도량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 조선시대의 미황사 >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고려 후기 절이 국내외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었고, 조선시대 전기에도 사세를 꾸준히 유지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권35 영암(靈巖) 불우조(佛宇條)에 통교사, 미황사가 기재되어 있어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정유재란 때(1597) 전남의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건물이 불타버리고 기록마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중기 이후의 역사는 1754년(영조 30)에 기록된 <미황사법당중수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상량문은 1982년 대웅전 복원 공사 때 발견된 것으로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3차례의 중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중건은 1597년(선조 30)정유재란 때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어 다음해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1601년에 마무리되었으며, 이 때의 불사는 만선(晩善)스님이 담당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그 뒤 1658년(효종 9)에서 1660년(현種)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성간(省侃)·수신(脩信) 스님이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1751년(영조 27)에 덕수(德修) 스님에 의해 시작되어 상량문이 씌어진 1754년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때의 불사 내용은 1751년에 동서 양쪽에 금고각(金鼓閣)을 세우고 이듬해 기와를 바꾸었으며, 1753년에는 보길도(甫吉島)에서 목재를 실어 왔으며 대둔사의 아랫마을 사람들이 공사를 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대웅전과 나한전을 완공했습니다.

 한편 18세기에는 고승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 스님은 여러 차례 머무르면서 미황사의 여러 일을 간여하였습니다 미황사는 지역적으로 해안가에 위치하여 바다와 관련되는 불사가 많이 행해졌는데, 스님은 「천변불사소(川邊佛事疏), 천변시왕소문(川邊十王疏文)」으로 물에 빠진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수륙도장(水陸道場)을 개설하고 참회법석(懺悔法席)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연담 스님의 문집인 「임하록(林下錄)」을 절에서 1799년(정조 23)에 펴냈으며 스님의 입적 후 부도가 세워지는 등 스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1858년(철종 9)에는 영허 의현(靈虛義玄, 1816~1874) 스님이 이곳에서 만일회(萬日會)를 개설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의 만일회는 아미타신앙의 법회였다고 하는데, 이 같은 내용은 초의(草衣) 선사가 지은 <미황사만일회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절은 조선시대 중ㆍ후기에 걸쳐 이 같은 융성을 거듭하다. 100년 전 주지 혼허(渾墟) 스님이 중창을 위해 모금차 군고단(軍鼓團)을 이끌고 완도와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을 당한 뒤에 점차 퇴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현재의 미황사 >

 퇴락한지 100년이 흐른 후, 현재 미황사에 주석하고 있는 지운스님과 현공스님, 금강스님이 1989년에 주인 없이 비어있던 미황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흔적만 남은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 부도암 등을 복원하고, 퇴락한 세심당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10여년 간 중창불사 원력을 세워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면모가 일신되었습니다.
 

 현재의 전각은 보물 947호인 대웅보전, 보물 1183호인 응진당과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선원), 달마전(승방), 세심당(수련원), 요사체(후원), 향적전(객실), 안심료(후원), 보제루(누각), 감로다실(종무소)이 반듯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 유물과 유적 >

 

  1. 대웅보전(보물 947호)

                                                                                                                              

 염주를 굴리 듯 한 발 한 발 미황사 입구 돌 계단을 타고 오르면 바다처럼 푸른 하늘, 우뚝 솟은 달마산과 그 아래 대웅보전의 팔작 지붕이 춤을 추듯 흔들리며 다가온다.


 보물 제947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1982년에 보수 공사 중 발견된 "대법당중수상량문"(1754년 작성)에 의하면 응진전과 함께 1751년에 중수되었다.
오랜 세월에 씻겨 건물 외부의 단청이 지워지고 나뭇결이 보드랍게 살아 대웅보전을 찾는 이에게 소박한 아름다움과 따뜻함을 전해준다.


법당 안에는 목조삼존불(석가모니불, 아미타불,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의 닷집은 이 곳이 부처님의 집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듯 장엄화려의 극치를 구가하고 있으며, 법당안에는 소종과 법고, 법고대, 괘불등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천장에는 범어(인도 싼스크리스트어)로 쓰여진 글자와 일천불의 벽화가 있는데 국내에서 보기드문 수작이다.  특히 천장 곳곳에 그려진 천불의 부처님 때문에 미황사 대웅전에서 세 번만 절을 올리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부처님이 천 분이시니 세 번이면 삼천 배가 되니 어찌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이 있으랴?

   대웅보전은 미황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배(인도에서 경전과 부처님상을 싣고온 배)를 상징하기도 하고, 반야용선의 의미도 있는데 이는 중생계에서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는 배를 상징하기도 한다.  

   미황사의 대웅전은 위에서도 내려다 볼 수 있는데

대웅전과 응진당 사이의 계단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면

온 세상의 업을 이고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고

그 시간이 서쪽 바다로 해 떨어질 무렵이라면 마음속 찌꺼기는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이다.

 

2. 명부전

모든 악은 짓지 말며                   諸惡莫作(제악막작)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하며               衆善奉行(중선봉행)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한다면            自淨其意(자정기의)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是諸佛敎(시제불교)

 착한 일에는 즐거움이 따르고 나쁜일에는 괴로움이 따름을 설하여  

인과(因果)의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괴로움에서 벗어나 천상에 태어나도록 하는 하는 법문이다.

  이 인과법(因果法)에 무지한 사람은 지옥에 나게 되는데 이 지옥 중생까지 구제하겠다는 원력을 세우시고 자신의 성불을 미루신 분이 바로 지장보살님 이시다.

 

그래서 지장보살님은 흔히 죽은 이를 위한 변호사로 불린다. 저승의 염라대왕 앞에는 업경대가 놓여 있는데 이는 저승에 당도한 망자가 평생에 있었던 사소한 사건까지 업경에 영상으로 비치며 지나가고 그에 따라 서기가 옆에서 죄목을 일일이 두루마리 문서에 받아 기록한다.

 

이 문서를 저울에 달 때 무게가 나가는데 죄가 무겁다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한다. 이런 장면들이 시왕 탱화에 묘사되어 있고 지장보살님은 업경대 옆에서 죄를 가볍게 처리하도록 변호하여 주는 것이다.


이런 지장보살님을 모신 곳이 명부전이고 미황사의 명부전은 대웅보전 옆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명부전 안에 있는 10대 시왕을 조각해 모신 사람은 '자화상'이 국보로 지정되어  유명한 공재 윤두서다. 그가 명부전에 10대 시왕을 모신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어 절 근처에 있던 은행나무를 베어 10대 시왕을 조성했는데 그 후 신기하게도 10명의 아들을 보았다 한다. 더욱 믿지 못할 일은 시왕 중 네 번째 시왕의 두 눈 크기가 실수로 서로 다르게 조각되었는데 그의 넷째 아들도 눈 크기가 달랐다 한다.

 3. 괘불

  대웅보전 안에는 '고려 불화의 아름다움과 조선 불화의 단순미를 고루 간직한 괘불이 모셔져 있다. 이 괘불은 조선 후기 괘불(영조 3년 1727년)로 높이가 12m, 폭이 5m나 되는 큰 것이다. 그 크기가 워낙 커서 괘불을 거는 데만 30명의 인원이 필요하다. 이 괘불은 다른 괘불처럼 야외 법회 때 걸기도 하지만 또 다른 용도로도 쓰여져 왔다. 


  가뭄이 극심할 때 이 괘불을 걸고 제사를 지낸 연후에 달마산 정상에 올라 불을 지피면 비를 내려준다고 한다.  그래서 지독한 가뭄이 들면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괘불을 내걸고 마을제사로 기우제를 지내자고 요청한다고 한다.

 

실제로 1992년에 기우제를 지냈는데 제를 지내고 서너 시간이 지나자 달마산으로 먹구름이 몰려와 폭우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 괘불은 현재 국가지정문화재로 심의 중이다.


  4. 부도전(浮屠殿)

  대웅보전에서 세심당을 지나 남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5백 미터 쯤 올라가면 동쪽에 21기의 부도와 다섯기의 탑이 있는 부도전이 있다. 이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1백 미터 쯤 되는 곳에 6기의 부도가 울창한 나무들에 싸여서 적막을 즐기고 있다. 모두 조선시대 후기, 1700년경부터 세워졌다.
  부도로 모셔진 스님들은 조선 후기 대둔사와 미황사 대중의 존경을 받는 큰스님들로서 조선후기 화엄의 대가로 꼽히는 연담유일 스님을 비롯해서 대둔사 12종사의 한 분인 벽하, 설봉 그리고 정련, 정암, 송파, 낭암…등 당시의 내로라하는 스님들이다. 이 부도전으로 하여 당시 미황사의 사세나 이곳을 중심으로 수행했던 스님들의 수행의 깊이를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문고리를 잡아당기면 금방이라도 스님이 나오실 것 같은 부도, 옥개석에 귀면(鬼面)이 무섭기보다는 장난이라도 치고 싶은 부도, 그리고 대웅전에도 있었던 게와 거북이며, 오리, 물고기, 문어, 원숭이, 토끼, 용머리, 도깨비 얼굴, 연꽃들이 새겨진 부도들은 종교적인 권위보다는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꾸밈이 없어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즐거움에 빠지게 된다.  
 

  5. 미황사 사적비

 부도밭에서 내려오면 길 오른쪽 축대아래에 폭 1.3m 높이 2.9m 정도의 비석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미황사 사적비'로 이 근처는 창건설화에 나오는 통교사가 있던 자리로 보인다.
조선 숙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쓴 이 사적기(숙종 18년, 1692년)에는 미황사의 창건설화가 전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신라 경덕왕 8년(749) 돌배(石船) 한 척이 사자포(땅끝마을) 앞 바다에 나타났다. 며칠동안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다가오기를 반복하였다. 이에 의조(義照)화상이 제자들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하자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 안에는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었고 금함(金函)과 검은 바위가 있었다. 금함 안에는 화엄경·법화경과 비로자나불·문수보살·보현보살 등이 들어 있었고, 검은 바위가 깨지면서 검은 소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 "나는 우전국(인도)의 왕이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안치하면 국운과 불교가 크게 일어날 것이다"고 하였다.


다음날 의조화상이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달마산 중턱에서 한번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한참을 가다가 다시 넘어지더니 소는 일어나지 못했다. 의조화상은 소가 처음 멈췄던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세웠다. 절 이름은 소의 울음소리가 매우 아름다워 '미'자를 넣고 금인의 빛깔에서 '황'자를 따 '미황(美黃)사'라 했다 한다.

  이와 같은 창건설화는 중국을 통하지 않고 인도에서 바다를 통해 직접 부처님을 모셔와서 창건되어진 해로전래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6.응진당(應眞堂)


 

  대웅보전에서 석축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규모의 응진전이 외벽 담을 두르고 서 있다. 미황사의 副佛殿인 응진당(보물 1183호)은 석가모니부처님, 좌우에 아난, 가섭존자가 모셔져 있고 16나한상, 인왕상, 시자상, 동자상 및 불패가 모셔져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응진당 내부 벽면에 수묵(水墨)으로 그려진 나한 벽화는 유려한 선맛이 선필(禪筆)의 경지를 보인다.


  건축연대는 1982년 대웅전 보수공사 때 대들보에서 나온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대웅전과 같은 해인 1751년 상량(上樑)된 것으로 18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응진당 마당은 사찰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이 응진전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일품이다. 특히 해질 녘 진도와 그 밖의 뭇섬들이 붉은 바닷물 위로 떠 있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다. 1993년 도지정 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되었고 2001년 보수공사를 마쳤다.


  7.삼성각

미황사의 삼성각은 산신(山神)·칠성(七星)·독성(獨聖)을 함께 모시는 전각이며 산신탱화,
독성탱화, 칠성탱화가 모셔져 있다..
 

  산신(山神)은 한국의 토속신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선신으로 미황사 삼성각에 모셔놓은 산신탱화(삼성각 정면 좌측)는 화면 왼쪽에 호랑이를 걸터앉은 산신과 그 좌우에 동자와 여인이 자리한 구도이다. 동자와 여인은 독성탱화의 것과 모습이 흡사하다. 화면 하단 오른쪽에 기록된 화기란에 불기 2970년 해남군 송지면 大竹里에 거주하는 金仕琡 일가가 시주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불기 2970년은 1943년이다. 크기는 가로 112cm 이고 세로 97cm 이다.
 

  독성은 천태산(天泰山)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독성(獨聖)·독수성(獨修聖)이라 불린 나반존자(那畔尊子)를 일컫는다. 미황사 삼성각에는 독성탱화(獨聖幀畵)(삼성각 정면 우측)를 모신다. 그림은 천태산과 소나무·구름 등을 배경으로 희고 긴 눈썹을 드리운 스님이 왼손에 염주를 들고 앉아 있고 차를 달이는 동자와 여인이 등장한다. 화면 하단 오른쪽에 기록된 화기란을 보면 완도읍에 사는 이유복과 장순복이 아들을 얻은 기념으로 시주한 듯 하며 신미년 오월이라는 간지로 보아 1943년을 말한 것으로 여겨진다. 크기는 가로 112cm이고 세로 97cm 이다.
 

  칠성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북두칠성을 뜻하며, 본래 중국의 도교사상과 불교가 융합되어 생긴 신앙이다. 미황사의 칠성탱화(삼성각 정면)는 화면 중앙에 가득하게 치성광여래를, 그 좌우에 일광 월광보살을 그렸다. 하단 중앙에 기록된 화기란에 의하면 1943년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미황사 달마산 2


   
♣ 남해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489m) 서쪽에, 우리나라 육지의 사찰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한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세워졌다.  불교가 한창 흥할 때는 불교의 요람이 되어 스님도 많았고 주위에 12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미황사는 조선시대 중.후기에 걸쳐 이같은 융성을 거듭하다 100년전 주지 혼허(渾墟) 스님이 중창을 위해 모금차 군고단(軍鼓團)을 이끌고 완도와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을 당한 뒤에 점차 퇴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퇴락한지 100년이 흐른 후, 현재 미황사에 주석하고 있는 지운스님과 현공스님, 금강스님이 1989년에 주인없이 비어있던 미황사를 찾아 흔적만 남아 있던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 부도암 등을 복원하고 퇴락한 세심당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10여년 간 중창불사 원력을 세워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면모가 일신되었다.
  
현재의 전각은 대웅보전(보물 947호), 응진당(보물 1183호)과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선원), 달마전(승방), 세심당(수련원), 요사체(후원), 향적전(객실), 안심료(후원), 자하루(누각), 감로다실(종무소)이 반듯하게 자리하고 있다.

서해바다로 지는 화려한 낙조와 수려한 달마산을 배경으로 한 미황사는 방문객들에게 늘 즐거운 풍경을 제공해준다.  
우선 뒤편의 산자락과 잘 어울리는 위치에 알맞은 규모로 자리잡은 절터와 대웅보전의 앉음새에서 편안함이 느껴진다. 특히 대웅보전 주춧돌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거북, 게 등 바다생물이 새겨져 있으며, 가뭄이 들 때 걸어놓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를 내리게 한다는 괘불(보물1342호)과 대웅보전이나 웅진전 안 벽과 천장에 그려진 18세기의 벽화들, 응진전과  명부전 안에 모셔진 보살, 나한, 동자, 신장상 등 조각을 살피는 재미가 사뭇 크다.  
대웅보전 앞마당에는 긴 돌확이 있어 항시 맑은 물이 찰랑거리고, 그 앞을 가로질러 오른쪽 숲속으로 난 길을 들어서서 소나무와 동백나무 사이로 길을 따라 10분 정도 가면 부도밭에 닿는다. 부도마다 거북, 게, 새, 연꽃, 도깨비 얼굴 등이 새겨져있어 한적한 산속에서 뜻밖에 꾸밈없는 표정들을 만날 수 있다.

절에서 산 정상까지는 약 1시간 거리로 기암괴석이 들쭉날쭉 장식하고 있어 거대한 수석을 세워 놓은 듯 수려하기 그지없다. 이곳에서 보는 다도해와 서해의 낙조는 매우 아름다우며, 절 바로 아래에는 동백나무 동산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신문기사 (오마이뉴스)
우리나라에는 아름다운 절이 많다. 그 중에서도 미황사를 최고 아름다운 절로 꼽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미황사는 우리나라 가장 남쪽 끝 전남 해남의 절이기도 하다. 땅끝 마을이 이 절에서 별로 멀지 않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 오밀조밀 바위를 허옇게 드러내고 있는 달마산 쪽으로 올라가면 미황사가 나온다. 오동나무 숲을 지나 올라가면 커다란 누대가 앞을 가로막는다. 좌우의 오동나무 숲이 일주문, 천왕문의 역할을 한 셈이다. 경사가 심한 곳에 절간을 세웠으니, 누대 아래 통로를 만들어 그 속으로 올라가는 누하진입이 당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누대를 다 올라가면 신천지가 펼쳐진다. 저 멀리 달마산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그 중앙에 대웅전이 기품 있게 자리 잡고 있다. 달마산은 남쪽의 금강산이라고 할 만큼 화려하고 깔끔하다. 이 산을 배경으로 한 대웅전이 두 팔을 벌려 오는 이들을 맘을 열어 제치고 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좌우의 요사채와 뒤쪽의 응진당 등 최소한의 건물들과 뒤쪽의 산세는 애초부터 한 짝일 수밖에 없었다.

대웅전의 굵직굵직한 기둥은 원래부터 그랬는지 허옇게 속살을 다 내놓고 있다. 막돌로 쌓은 높직한 기단이 대웅전의 크기와 적당하다. 공포의 단청도 세월에 바랬다. 대웅전은 까만 머리와 속살을 살짝 드러낸 여성이 아름다운 몸매를 부끄러운 듯 뽐내며 두 팔을 벌려 환영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에 압도당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절간 찾는 재미 하나는 놓치는 사람이다.
좌우에 놓인 계단을 올라 옆문으로 대웅전 안에 들어간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집이다. 부처님이 계신 세상이니 진리의 세상이고, 극락의 세상이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 분의 부처님이 앉아 있다. 부처님들은 깨끗한 탱화를 배경으로 앉아 있고, 그 자리를 위쪽의 닫집과 좌우 기둥의 용 그림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무언가 신성한 일이 금방 일어날 것 같다. 신성하고 경건한 진리의 세상이 이런 분위기인가 보다. 표현은 전혀 다르지만 유명한 성당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지붕의 무게를 기둥으로 전달하는 공포가 많다. 기둥 밖으로 뻗은 지붕을 힘 있게 지탱하기 위해서 기둥 위만 아니라 그 사이에도 두 개를 더 설치하였다. 지붕은 측면도 경사지게 만든 팔작이다. 이른바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서까래를 받치는 도리를 기둥 바깥으로 3개, 안으로는 4개나 더 내걸었다. 외3출목 내4출목의 복잡하고 화려한 형식을 갖추었다.

공포 각 부재는 안팎의 장식에 최대한 활용하였다. 공포 살미의 끝은 위로 한껏 치올라갔고, 3단으로 짜인 각 부재 아래 부분은 꽃잎처럼 장식하였다. 마치 집 전체가 활짝 핀 꽃모양이 되었다. 중앙의 두 기둥 위에는 들보를 끌어내고, 그 끝에 용을 조각해 넣었다. 정면이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로 물씬 상승되고 있다.

바깥에서 대웅전을 쳐다보면서 형성된 신성한 감정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더욱 심화된다. 내4출목의 공포는 화려의 극을 달리고 있다. 천정 아랫부분이 활짝 핀 거대한 연꽃처럼 보인다. 그 연꽃 가운데로 수많은 부처와 보살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그 아래에는 최고급 단청을 한 대들보가 가로지르고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 반듯반듯한 천정을 해 넣었다. 여기에 도안한 범어자와 온갖 풀과 동물 문양의 그림을 그렸다. 한마디로 화려의 극을 달리고 있다. 고려와 조선 전기 건축물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함이다. 17세기 사람들은 부처님 진리의 세상은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대웅전에서 나와 돌담이 트인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응진당이 나온다. 부처는 아니지만, 부처님의 제자나 고된 수행을 거쳐 진리를 깨달은 역대의 고매한 존재를 모신 집이 응진전 혹은 나한전이다. 부처보다 한단 아래 존재이니 집 이름도 그에 걸맞게 응진당이라 붙이기도 한다. 부처의 가르침을 받은 존재이니 중앙에 부처가 있고 좌우에 나한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대웅전과는 달리 응진당은 최근에 빽빽이 단청을 하였는지 일단 형형색색으로 더욱 화려하다. 대웅전이 기품 있게 화려하다면, 그의 제자격인 응진당은 크기와 위치에서 격하되었고, 화려한 색을 동원하여 금방 눈에 띄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품격에 있어서 자신 자리 찾기의 본모습이라 하겠다.

응진당은 중앙에 계단을 가진 막돌로 쌓은 조그만 기단을 가졌다. 작은 건물이지만 외3출목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화려해질 수 있는 조건을 다 지니고 있다. 중앙 두 기둥 위에는 대들보를 빼내어 용을 조각해 넣었고, 귀퉁이 쪽 두 기둥 위에는 앙증맞은 도깨비 그림을 그려 넣어 분위기를 한껏 돋우고 있다.

정면에만 문이 있으니 중앙으로 들어간다. 내4출목의 공포가 빽빽이 천정 아랫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천정은 네모반듯한 천정이다. 우물 정(井)자 모양 같다고 해서 우물천정이라고 한다. 네모 안에는 연꽃을 동그랗게 그려 넣었다.

공포의 각 부재들을 대웅전의 화려한 꽃모양과는 달리 부드럽고 우아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응진당의 내출목을 대웅전처럼 처리했더라면 극을 달한 치장끼리 충돌하여 매우 천박해졌을 것이다. 작은 규모의 건물은 치장의 절제를 통하여 품격을 더 높일 수 있음을 우리는 이 응진당에서 느낄 수 있다.

미황사는 17세기에 만든 기초 위에 18세기 건축 방식이 개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절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이후 17세기 중엽에 중건하고, 18세기 중엽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응진당에는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여럿 나열해있다. 매우 개성적인 모습이다. 부처님은 깨달은 존재로 전지전능하지만, 매우 멀리 있는 존재로 느끼기 쉽다. 나의 소원은 너무 사소하여 잘 들어줄 것 같지 않다. 이런 때는 바로 응진당을 찾아 맘에 드는 분을 골라 떼를 쓰면 될 일이다. 논산 쌍계사에도 이런 분들이 수두룩하게 자리에 앉아 있다. 우리시대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냄새가 심해진다.

이제 날은 어둑어둑해져 미황사를 떠나야 한다. 응진당의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분들도 헤어져야 한다. 뒤돌아보면 멋있는 달마산이 왈칵 발걸음을 낚아챈다. 누대 아래로 내려가면 대웅전이 속살까지 드러낸 아름다운 자태로 자고 가라고 유혹한다. 이대로 가면 언제 다시 저 품에 안길 수 있을까? 그냥 콱 여기서 살아버릴까? 자식들 얼굴이 금방 떠오른다. 할 수없이 발길을 옮긴다. 대웅전이 말한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거라”  
  ○ 해남읍버스터미널 앞에서 완도방면 13번국도를 따라 약 20km쯤 가면 현산면농협 앞이다. 농협 앞에서 완도방면으로 8.3km 더 가면 길 오른쪽에 S-oil 월송주유소 앞. 여기서 0.5km 더 가서 오른쪽 월송리 가는 1번 군도로로 우회전. 이 길을 따라 송지방면으로 6km쯤 가면 서정리 서정초등학교(오른쪽) 를 지나게 되고 학교 지나면  곧바로 길 왼쪽으로 미황사 가는 길이다. 길을 따라1.6km쯤 산 속으로 가면 미황사 입구 주차장이다.  
○ 강진, 완도방면에서는 남창, 월송을 경유하면 된다.
월송 - 서정리   5Km,  서정리 - 미황사 2Km
서정리 - 송호해수욕장 13 Km,  서정리 - 땅끝마을 15 Km
  ○ 북위 34도 17분 38초. 한반도의 최남단 땅끝. 전남 해남은 육지의 끝을 품은 또 다른 극점이다.
혹시 한계에 서 본 적이 있는가 . 일상에 지치고 체념에 스러져 맥없이 떠밀려 온 벼랑. 끝은 낯설음이요 두려움이다. 하지만 막상 더는 갈 수 없는 그 곳에 서면 드디어 멈춰 있던 내 안의 엔진이 작동한다. 내면의 울림이 들리기 시작하고 맑은 사색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속절없이 낙하하던 공이 바닥에 이르러 튕겨 오르듯, 끝은 반동(反動)의 생명력을 불어 넣는 곳이다. 더는 갈 수 없음이 다시 시작할 눈을 뜨게 해 줘 이 뭍의 끝자락은 다시 뭍으로 향한 출발점이 된다.
절망을 털고 희망을 안고 가는 해남의 땅 또한 모든걸 감싸 안을 만큼 따뜻하고 아늑하다. 한반도의 끝에 삐죽 솟은 해남은 그 자체로 3면이 바다인 반도다. 호수 같은 바다와 보석 같은 섬들로 둘러싸이고 핏빛 황토의 들판이 출렁이는 넉넉한 땅이다.
산세의 수려함도 녹록지 않다. 백두대간의 성난 호흡은 지리산에서 정점을 찍은 뒤 땅끝으로 흘러 들어 숨을 고른다. 영암의 월출산을 관통한 그 흐름은 '해남의 영산(靈山)' 두륜산에서 자태를 뽐내고 다시 '해남의 금강(金剛)'이라 하는 달마산에 내려와 마지막 혼을 불사른다.
질박한 아름다움이 숨쉬는 해남, 생명의 싱그러움이 꿈틀대는 땅끝. 그대 혹시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가. 그럼 지금 해남으로 가시라. 그 임계점으로.

해남의 땅끝 마을이 육지의 최남단이라면 달마산의 미황사는 육지 끝의 절이다. 목포에서 고속 도로를 빠져나와 미황사로 향하는 길은 걸쭉한 남도의 풍경을 제대로 느끼게 한다. 시뻘건 황토 벌판이 넘실대고, 간척 사업에 막혀 호수가 된 바다는 소르르 해무를 피워 낸다.
두륜산의 자락은 땅끝으로 이어지다 달마산에서 수직 바위를 일렬로 뿜어냈다. 최고 높이 489m로 높지 않으나 해수면에서부터 솟아 오른 덕에 산세가 녹록치 않다. 칼처럼, 창처럼 솟구친 바위의 능선은 달마산 정상인 불선봉을 지나 도솔봉(421m)까지 약 8㎞에 거쳐 이어진 다음 땅끝에 솟은 사자봉에서 갈무리된다.
이 달마산을 병풍 삼아 서편 자락 볕 좋은 곳에 미황사가 자리 잡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절로 오르는 길에는 동백나무가 열지어 섰다. 지금은 다 지고도 남을 때인데 어쩌다 한 두 송이 여전히 붉게 꽃을 피우고 있다. 강인한 생명력이다.
미황사 대웅전 뜨락에 서니 거기가 바로 극락이다. 미끈하게 잘 생긴 대웅전은 긴 세월 동안 단청의 빛이 바래 맨 얼굴이다. 화장하지 않은 기둥과 지붕은 투명한 나뭇빛 그대로다. 독경 소리 울려 퍼지는 대웅전 너머로는 달마산 암봉이 마치 호위 군사마냥 늘어서서 사찰을 지키고 있다. 마냥 넋을 빼는 풍경이지만 경내는 내려오는 길에 다시 둘러 보기로 하고 먼저 산으로 올랐다.
적당한 경사의 산길은 험하지도 또 너무 지루하지도 않아 산행에 제격이다. 낙엽이 썩고 또 썩어 만든 흙이라 새까만 길이 푹신하다. 초록의 터널을 지나는 길 내 숨소리마저 싱그럽다.
한 30분 올랐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 송글 맺힐 무렵 달마산 바위 병풍이 바로 앞에서 막아섰다. 뒤돌아 보니 해남의 붉고 푸른 들판이 쫘악 펼쳐졌다. 눈부시도록 하얀 바위들은 햇볕을 마냥 빨아들이며 섰고 발아래 나무들은 푸른 옷으로 뒤덮였다.
조금만 더 바위를 타고 오르니 능선의 정점 문바위다. 건너편은 해남의 서편 바다가 지척이다. 굽이치는 땅무리와 점점이 떠 있는 섬들. 옅은 해무 사이로 아련히 보이는 다도해의 풍경은 잔잔한 진동으로 마음을 들뜨게 한다. 공룡의 등짝처럼, 톱니처럼 늘어선 달마산 암봉의 능선도 옆에서 보니 그 흐름은 더욱 급하게 물결 쳤다.
미황사는 경을 싣고 가던 소가 누워 점지했다는 절집으로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창건된 천년 고찰. 한 때 도솔암 문수암 등 12암자를 거느렸던 큰 절이었다. 전란 등을 거치면서 절은 불탔다가 다시 지어지는 등 부침을 거듭했다. 1900년대 초 주지 혼허 스님이 중건을 위해 모금차 스님들의 공연단인 군고단(軍鼓團)을 이끌고 완도 등 섬을 다녔는데 그 때 조난을 당해 젊은 스님들이 몰살됐다고 한다. 군고단 준비로 진 빚 때문에 절은 쇠퇴했고 잊혀져 왔다.
퇴락했던 절이 지금의 단아한 모습으로 살아난 것은 89년 이곳에 온 주지 금강 스님과 현공 스님 덕분이다. 두 분이 ‘지게 스님’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손수 돌을 나르고 굴삭기를 운전해 대웅전과 응진전 외에 흔적만 남아있던 누각들을 복원해 냈다.
미황사는 2002년부터 템플 스테이를 실시하고 있다. 예불 참선 다도 등 산사에서의 전통 문화를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다. 홈페이지(www.mihwangsa.com)와 전화 (061)533-3521로 미리 예약하면 된다.
[한국일보 2005-05-26]
  ○ 미황사 홈페이지  클릭 ■☞ http://www.mihwangsa.com
 

○ 대웅전(보물947호), 응진당(보물 1183호), 괘불(보물 1342호)

 

 

출처 ; 글 1 - 미황사홈

                  글 2 - 한국의산천님홈

         사진  - 미황사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