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급 문화재를 찾아서 27 - 국보 제 29호 성덕대왕신종 (聖德大王神鍾)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다.
국보 제 29호 성덕대왕신종 (에밀레종)의 진실
1. 통일신라 기술의 결정체 성덕대왕 신종 진실
통일신라의 성덕대왕신종은 그 오묘한 소리와 아름다운 형태로 세계의 칭송을 받고 있다.
아름다운 종소리를 만들기 위해 어린아이를 넣었다는 전설 때문에 우리에게는 에밀레종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의 아름다운 소리보다 더 놀라운 점은 앞으로 성덕대왕신종과 같은 종을 다시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현대기술로도 만들기 힘들 만큼 뛰어난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맑고 긴 천상의 울림을 만드는 ‘맥놀이’
성덕대왕신종은 장중하면서도 맑은 소리가 난다. 특히 유난히 길고 특별한 소리의 여운을 남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히 천상의 울림이라 할 만 하다. 이 특별한 소리는 유리잔이나 종 같이 속이 빈 둥근 몸체를 두드릴 때 나타나는 ‘맥놀이 현상’ 때문이다.
맥놀이란 두 음파가 서로 간섭을 일으켜 진폭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을 말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원래의 소리(진동)와 반대편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소리가 마주치면서 합해지거나 적어지는 현상이다.
두 소리가 합해질 때는 소리가 커지며 적어질 때는 소리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성덕대왕신종은 타종 후 9초부터 ‘에밀레~’ 소리가 한번 나면서 사라지는 듯하다가 다시 9초 후 약하게 울음을 토해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9초를 주기로 맥놀이를 한다. 또 사람이 숨을 쉬는 듯한 ‘허억~’ 하는 작은 소리도 같은 방식으로 3초마다 한 번씩 맥놀이를 한다.
이 소리가 가장 나중까지 남는데, 3초는 사람의 숨소리 주기와 비슷해 익숙한 느낌을 준다.
맥놀이 횟수는 1초당 6회 정도까지는 좋은 느낌을 주지만 30~40회 정도가 되면 불쾌감을 준다.
성덕대왕신종 소리의 주성분은 기본진동수 64헤르츠(Hz) 근방의 음파와 168Hz근방의 음파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 음파들은 각각 진동수가 조금씩 차이 나는 두 쌍의 음파로 구성된다.
각각 64.06Hz와 64.38Hz, 168.31Hz와 168.44Hz의 음파가 섞인 소리인 것이다. 이들 진동수의 미묘한 차이가 맥놀이를 일으킨다
성덕대왕신종의 낱소리 음파는 1,000Hz 이내에서만 무려 50여 가지나 된다.
이에 비해 일반 종소리의 낱소리는 20여 가지여서 성덕대왕신종 소리보다 빠르게 소멸된다.
성덕대왕신종은 낱소리 수가 많아 타종 후 소리가 거의 사라진 후에도 숨소리 같은 64Hz와 어린아이 울음소리 같은 168Hz의 음파가 남아 심금을 울린다.
성덕대왕신종이 맥놀이를 유발하는 원인은 두 가지다.
우선 종의 재질이나 두께가 균일하지 않아 종소리의 진동수가 미세하게 차이 난다.
겉보기에는 완전한 대칭을 이루지만 표면의 문양과 조각이 비대칭을 이루고 몸체 곳곳의 밀도나 두께도 미세하게 다르다.
또한 범종 내부에는 쇠 찌꺼기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서양종은 이 같은 비대칭성과 비균일성을 가능한 한 제거하기 때문에 맥놀이 현상이 제대로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은은하게 울리지 않고 소위 ‘학교종이 땡땡땡’처럼 다소 경박한 소리가 난다.
한국과학기술원의 이병호 교수는 주파수 스펙트럼 분석(Frequency Spectrum Analysis)으로 화음상의 평점을 계산해 여러 종소리를 비교 평가했다.
이 분석방법은 음질 평가치를 정의해 그 수치를 계산하는 방법이다.
종을 100점 만점으로 평가했을 때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일본의 범종학자인 쓰보이 료헤이(坪井良平)는 일찍이 일본의 NHK방송국에서 세계적인 명종들의 종소리를 모두 녹음해 일종의 ‘종소리 경연대회’를 연 일이 있다. 당시 성덕대왕신종의 종소리는 단연 으뜸이었다.
우리나라 종 제작기술의 결정체
성덕대왕신종은 여러 가지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모양의 용뉴 부분에는 음관(용통)이라고 부르는 대나무 모양의 통이 하나 있다.
중국이나 일본 종에서는 볼 수 없는 이 구멍은 종이 울릴 때 내부에서 나는 잡음을 배출한다.
64Hz와 168Hz의 기본 진동은 내부로 되돌려 보내고 높은 진동수의 잡음은 재빨리 방출해 버리는 것이다.
서양의 종과 달리 우리나라의 종은 타격 위치(당좌, 撞座)가 정해져 있다.
성덕대왕신종의 당좌는 종의 안전이나 수명에 유리하며 소리의 여운도 길어지도록 절묘하게 제작됐다.
수학적으로 계산하자면 종을 매단 지점에서 당좌 중심까지의 이상적인 거리는 260cm다.
성덕대왕신종의 경우 당좌 중심까지의 거리는 238cm로 불과 22cm 차이를 보인다.
또 다른 구조적인 특징은 종 아래에 반원형으로 움푹 패인 부분인 명동(鳴洞)에 있다.
성덕대왕신종은 종각(鐘閣)에 높이 매달고 치는 것이 아니라 지상보다 조금 위에 매달고 친다.
이때 종구(鐘口) 바로 밑에 만들어 놓은 명동은 소리가 울리도록 하는 공명동(共鳴洞)의 역할을 한다.
아래 반원형으로 움푹 패인 명동(鳴洞)은 종소리가 울리도록 하는 공명동 역할을 한다
이 명동 시스템은 세계 다른 나라 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라 특유의 시스템이다.
이렇게 음관으로 종 내부의 잡음을 빨아내고 명동 시스템으로 공명진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종을 쳤을 때 긴 여운이 남는다.
성덕대왕신종은 납형법(蠟型法)으로 제작됐다.
만형법(挽型法) 또는 회전형법으로 제작된 일반종과 비교하면 그 형태나 소리 모두에서 차이가 난다.
납형법은 청동으로 범종을 만드는 방법 중 가장 어려운 기술이다.
주로 작은 종을 제작할 때 쓰이는 방법인데, 거대한 성덕대왕신종이 납형법으로 제작됐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성덕대왕신종을 만들려면 20여 톤의 쇳물에 여분 20∼30%를 더해 총24∼26톤의 쇳물을 끓여 동시에 부어야 한다.
끓는 쇳물을 거푸집에 일시에 부을 때는 압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거푸집을 웬만큼 튼튼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또 뜨거운 쇳물을 쏟아 부으면 거품이 일어나 부글거린다.
이때 공기가 미쳐 빠져 나오지 못하고 굳으면 범종에 기포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성덕대왕신종에는 기포가 없다.
정말 어린아이를 쇳물에 녹였을까?
성덕대왕신종을 만들 때 종의 소리를 좋게 하려고 어린아이를 쇳물과 함께 녹였다는 전설에 대해서는 찬반의견이 분분하다.
청동을 주물 할 때 뼈 속에 있는 인(燐, Phosphorus)을 섞으면 산화석이 제거돼 강도가 세지고 녹슬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무쇠와 청동불상에는 인이 소량 들어있으므로 성덕대왕신종에서 인이 발견된다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70년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는 성덕대왕신종에서 한 어린아이의 유체 분량에 해당하는 인이 검출됐다고 발표했다.
통일신라시대에 불교가 매우 성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성덕대왕신종에 포함된 인은 동물의 뼈라기보다는 인신공양으로 사람의 뼈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1998년 포항산업과학원의 분석 결과 인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포항산업과학원에서도 전설이 사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사람의 비중이 구리보다 가벼우므로 만일 어린아이를 넣었다면 위에 뜬 상태에서 타기 때문에 쇠 찌꺼기처럼 남게 된다.
만일 성덕대왕신종 제작 당시에 이것을 불순물로 취급해 제거했다면 인이 검출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견해다.
기록이 없는 한1,300여 년 전의 일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통일신라 시대 때 우리 조상들의 종 제작기술이 종의 주조와 설계뿐 아니라
음향학, 진동학 등 최적 시스템을 활용해 성덕대왕신종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출처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국내장기전문가·과학저술가 /한국과학창의 재단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종이 있다
웅장하고도 해맑은 이 종 소리를 듣는 순간만큼은 누구라도 마음이 편안해지면서도
세속의 번뇌와 망상을 잊게 해 줄 수 있는 그야말로 오묘한 천상의 소리이다.
이처럼 소리와 아름다움에서 단연 우리나라 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국보 성덕대왕 신종은
꽤 오랫동안이나 그 어엿한 본명을 나두고 에밀레종이라는 애절한 이름으로 불려 왔다.
그런데 이 종에는 종의 몸체에 ’성덕대왕 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란 명문이 양각되어 있으며 원래는 경주 봉덕사란 절에 걸려 있던 종이다.
다시 말해 호적등본상의 이름이 성덕대왕 신종이라면 주민등록상으로는 봉덕사종이 맞지만
별칭에 해당되는 에밀레종에 관한 기록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이 종에 얽힌 전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잠깐이나마 성덕대왕 신종이 지나온 과거를 더듬어가 보도록 하자.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강원도 상원사(上院寺) 종(725년) 보다 불과 50여년 뒤에 만들어진 성덕대왕 신종은
한국 범종가운데 가장 큰 크기인 동시에 맑고 웅장한 소리와 아름다운 형태를 지녀 일찍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예술품으로 평가받아 왔다.
이 종이 걸려있던 절 이름을 따라 봉덕사종(奉德寺鐘)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봉덕사는 폐사되어 그 위치가 분명치 않지만 기록에 의하면 성덕왕의 원찰로서 경주 북천의 남쪽인 남천리에 있던 절로서
효성왕(孝成王) 대인 738년에 완공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효성왕의 아우인 경덕왕이 성덕왕을 위해 큰 종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오랜 세월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혜공왕(慧恭王)대인 771년 12월 14일에 이르러서야 완성을 보게 되어 성덕대왕의 신성스런 종(聖德大王 神鍾)으로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봉덕사종은 절이 폐사됨에 따라 이후에 여러 번 그 거처를 옮겨가게 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 2권에 보면 북천이 범람하여 절이 없어졌으므로 조선 세조(世祖) 5년(1460년)에 영묘사(靈廟寺)로 옮겨 달았다고 기록되었다.
그 후 다시 중종(中宗) 원년(1506)에 영묘사마저 화재로 소실되면서 당시 경주부윤(慶州府尹)이던 예춘년(芮椿年)이
경주읍성의 남문 밖 봉황대 아래에 종각을 짓고 옮겨 달게 되었는데, 징군 때나 경주읍성의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다고 한다.
한편 일제강점기 이후인 1915년 8월에 다시 봉황대 아래에서 관아가 있던 동부동 자리로 옮겨가게 된다.
그 사진은 마침 조선고적도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후 관아 자리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동부동 옛 박물관에 오랜 기간 동안 보관되어 오다가
1975년 5월에 현재의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종의 형태는 위, 아래가 좁고 배 부분이 불룩한 항아리형의 몸체에 상, 하대라는 문양띠를 두고 방형의 연곽(蓮廓)과 당좌, 주악상을 배치하였다.
몸체 위쪽으로는 한 마리의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을 붙이고 목 뒤로 굵은 음통이 솟아있는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성덕대왕 신종은 다른 통일신라 종과 구별되는 몇가지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연곽 안에 표현된 연꽃봉우리가 돌출된 일반적인 통일신라 종과 달리 8잎의 연판이 새겨진 납작한 연꽃 모습으로만 표현된 점이다.
또한 악기를 연주하는 일반적인 주악천인상과 달리 손잡이 달린 병향로를 받쳐 든 모습의 공양자상이 앞, 뒷면에 조각되어 있다.
이는 종의 명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인 만큼
성덕대왕의 왕생극락을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을 담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공양자상은 그 배치에 있어서도 종신의 앞, 뒷면에 새겨진 양각의 명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2구씩 마치 명문을 향해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이라는 점에서 이 종의 중심은 다른 종과 달리 기록된 명문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종구를 8번의 유연한 굴곡(八稜形)을 이루도록 변화를 준 점과 굴곡을 이루는 골마다 마치 당좌의 모습과 같은 원형의 연화문을 8곳에 새긴 점도
다른 종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요소이다.
종신 앞, 뒤의 가장 중요한 공간에 배치된 양각의 명문은 앞과 뒤의 내용을 구분하여 한쪽에는 산문으로 쓴 서(序)를,
다른 한쪽에는 네자(四句)씩 짝을 맞춘 명(銘)을 배치하였다.
특히 서의 첫머리에 있는 구절은 성덕대왕 신종을 치는 목적과 의미를 잘 전달해 주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 밖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눈으로 보아서는 그 근원을 알 수 없다.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서 진동하여 귀로 들어서는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설을 세우는데 의지해 세가지 진실의 오묘한 경지를 보듯이 신종을 매달아 놓아 [일승의 원음(一乘之圓音)]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글을 지은 사람은 김필오(金弼奧)이며 종의 제작자로는 주종대박사(鑄鍾大博士)인 박종일(朴從鎰)과 박빈나(朴賓奈), 박한미(朴韓味),
박부악(朴負岳) 등이 차례로 기록되었다. 구리 12만근이라는 엄청난 양이 소요된 내용을 밝히고 있는데, 실제 달아본 종의 무게만도 18.9ton에 달했다.
한편 이 종에 얽힌 에밀레종 설화는 일반적으로 종을 만들 때 시주를 모으는 모연의 설화와 달리 인신공양에 관계된 전설인 점에서 주목된다.
어린아이를 넣어 종을 완성함으로써 종소리가 어미를 부르는 것 같다는 애절하면서도 다소 잔인한 설화의 내용은
다른 한편으로 성덕대왕 신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실패와 어려움이 따랐는가를 말해 준다.
발원으로부터 제작까지 3대에 걸쳐 30여년이나 소요된 시간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실제로 불가에서 종을 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종소리를 통해 지옥에 빠져 고통 받는 중생까지 제도하고자 하는 대승적(大乘的) 자비 사상을 담고 있다.
하물며 범종을 완성하고자 살아있는 어린아이를 공양 하였다는 내용은 범종의 가장 궁극적인 조성 목적과 상반되는 그야말로 신빙성 없는 전설에 불과하다.
다행히 성덕대왕 신종의 과학적인 성분 분석에 의하면 상원사종과 유사한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었으며
미량의 납과 아연, 그리고 아주 극소수의 황 , 철, 니켈 등이 함유되어 있었다.
결국 세간에 떠도는 바와 같은 인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인체의 성분이 70%이상 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주조 당시에 사람을 공양하여 쇳물에 넣는 다는 것은 주조의 과정상 처음부터 종을 완성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과학적으로도 에밀레종의 유아희생 설화는 전혀 근거가 없는 전설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전설이 언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도 분명치 않다.
우리나라 범종의 최대의 걸작인 성덕대왕 신종에 관련된 조성에 관련된 내용이라면 그것이 비록 전설이나 설화이던 간에
어디에서라도 남아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한다.
아마도 조선 후기쯤 유림의 세력이 드높았던 경주 지역에서 불교의 인신공양을
범종에 결부시켜 종교적 폄훼를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론해 본다.
분명한 것은 이 종의 이름이 일반적인 종과 달리 성덕대왕 신종이라는 그야말로 가장 신성스런 종이란 것을 처음부터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기록된 명문에서 보이듯 일승의 원만한 소리인 부처의 말씀과 같은 종소리를 들음으로써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는 범종의 참 뜻을
성덕대왕 신종은 가장 잘 말해주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성덕대왕 신종이라는 어엿한 본명 대신 확인되지도 않은 에밀레종이란 별명으로 부르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처 : 최응천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교수 / 문화재청 헤리티지 차넬
聖德大王神鍾之銘」
朝散大夫兼太子司議郞翰林郞金弼奧奉敎撰」
夫至道包含於形象之外視之不能見其原大音震動於天地之間聽之不能」
聞其響是故憑開假說觀三眞之奧載懸擧神鍾悟一乘之圓音夫其鍾也稽」
之佛土則驗在於罽膩尋之帝鄕則始制於鼓延空而能鳴其響不竭重爲難」
轉其體不褰所以王者元功克銘其上群生離苦亦在其中也伏惟」
聖德大王德共山河而幷峻名齊日月而高懸擧忠良而撫俗崇禮樂而觀風」
野務本農市無濫物時嫌金玉世尙文才不意子靈有心老誡四十餘年臨邦」
勤政一無干戈驚擾百姓所以四方隣國萬里歸賓唯有欽風之望未曾飛矢」
之窺燕秦用人齊晉替覇豈可幷輪雙轡而言矣然雙樹之期難測千秋之夜」
易長晏駕已來于今三十四也頃者 孝嗣景德大王在世之日繼守」
丕業監撫庶機早隔 慈規對星霜而起戀重違 嚴訓臨闕殿以」
增悲追遠之情轉悽益魂之心更切敬捨銅一十二萬斤欲鑄一丈鍾一口立」
志未成奄爲就世今 我聖君行合 祖宗意符至理殊祥異於千」
古令德冠於常時六街龍雲蔭灑於玉階九天雷鼓震響於金闕菓米之林離」
離乎外境非煙之色煥煥乎京師此卽報玆誕生之日應其臨政之時也仰惟」
太后恩若地平化黔黎於仁敎心如天鏡獎父子之孝誠是知朝於元舅之賢」
夕於忠臣之輔無言不擇何行有愆乃顧遺言遂成宿意爾其有司辦事工匠」
畵模歲次大淵月惟大呂是時日月替暉陰陽調氣風和天靜神器化成狀如」
岳立聲若龍音上徹於有頂之巓潛通於無底之下見之者稱奇聞之者受福」
願玆妙因奉翊 尊靈聽普聞之淸響登無說之法筵契三明之勝心居」
一乘之眞境乃至瓊萼之叢共金柯以永茂邦家之業將鐵圍而彌昌有情無」
識慧海同波咸出塵區幷昇覺路臣弼奧拙無才敢奉 聖詔貸班超」
之筆隨陸佐之言述其願旨銘記于鍾也翰林臺書生大奈麻金符皖書」
其詞曰
紫極懸象 黃輿啓方 山河鎭列 區宇分張 東海之上 衆仙所藏」
地居桃壑 界接扶桑 爰有我國 合爲一鄕 元元聖德 曠代彌新」
妙妙淸化 遐邇克臻 將恩被遠 與物霑均 茂矣千葉 安乎萬倫」
愁雲忽慘 慧日無春 恭恭孝嗣 繼業施機 治俗仍古 移風豈違」
日思嚴訓 常慕慈輝 更以脩福 天鍾爲祈 偉哉我后 盛德不輕」
寶瑞頻出 靈符每生 主賢天祐 時泰國平 追遠惟勤 隨心願成」
乃顧遺命 于斯寫鍾 人神獎力 珍器成容 能伏魔鬼 救之魚龍」
震威暘谷 淸韻朔峯 聞見俱信 芳緣允種 圓空神體 方顯聖蹤」
永是鴻福 恒恒轉重」
翰林郞 級飡金弼奧奉 詔撰」
待詔大奈麻姚湍書」
檢校使兵部令兼殿中令司馭府令」
修城府令監四天王寺府令幷檢」
校眞智大王寺使上相大角干臣」
金邕」
檢校使肅政臺令兼修城府令檢」
校感恩寺使角干臣金良相」
副使執事部侍郞阿飡金體信」
判官右司祿館使級飡金忠得」
判官級飡金 忠封」
判官大奈麻金 如芿庾」
錄事奈麻金 一珍」
錄事奈麻金 張幹」
錄事大舍金 ▨▨」
大曆六年歲次辛亥十二月十四日鑄鍾大博士大奈麻朴從鎰」
次博士奈麻朴賓奈」
奈麻 朴韓味 大舍 朴負缶」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판독자 : 남동신
성덕대왕신종의 명
조산대부 겸 태자사의랑 한림랑인 김필오가 왕명을 받들어 지음.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의 바깥을 포함하므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으며,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 진동하므로 들어도 그 울림을 들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가설을 열어서 삼승의 심오한 가르침을 관찰하게 하고 신령스런 종을 내걸어서
일승의 원만한 소리를 깨닫게 한다.
대저 종이라고 하는 것은 인도에 상고해보면 카니시카 왕에게서 증험할 수 있고,
중국에서 찾아보면 고연이 처음 만들었다.
텅 비어서 능히 울리되 그 반향이 다함이 없고, 무거워서 굴리기 어렵되 그 몸체가 주름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왕자의 으뜸가는 공적을 그 위에 새기니, 중생들이 괴로움을 떠나는 것도 그 속에 있다.
엎드려 생각컨대 성덕대왕께서는 덕은 산하처럼 드높았고 명성은 해와 달처럼 높이 걸렸으며,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여 풍속을 어루만지고 예절과 음악을 받들어 풍속을 관찰하셨다.
들에서는 근본이 되는 농사에 힘썼으며, 시장에서는 남용되는 물건이 없었다.
아들의 죽음에 상심하지 않고 나이 많은 이의 훈계에 마음을 두었다.
40여 년 동안 나라에 임하여 정사에 힘써서 한 해라도 전쟁으로 백성을 놀라게 한 적이 없었다.
일찍이 전쟁을 엿보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연(燕)나라와 진(秦)나라에서 사람을 잘 쓰고
제(齊)나라와 진(晉)나라가 교대로 패업을 완수한 일을 가지고
어찌 나란히 말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돌아가실 날은 예측하기 어렵고 죽음은 쉽게 찾아온다.
돌아가신지 지금까지 34년이다.
근래에 효성스런 후계자인 경덕대왕께서 세상을 다스리실 때 큰 왕업을 이어 지켜 뭇 정사를 잘 보살폈으나,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어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움이 일어났으며 거듭 아버지를 잃어 텅빈 대궐을 대할 때마다
슬픔이 더하였으니, 조상을 생각하는 정은 점점 슬퍼지고 명복을 빌려는 마음은 더욱 간절하여졌다.
삼가 구리 12만 근을 희사하여 1장이나 되는 종 1구를 주조하고자 하였으나,
그 뜻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문득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의 우리 성군께서는 행실이 조상에 부합하고 그 뜻이 지극한 도리에 부합되어 빼어난 상서로움이
과거보다 기이하며 아름다운 덕은 현재의 으뜸이다.
온 거리의 용이 궁궐의 계단에 음덕의 비를 뿌리고 온 하늘의 천둥이 대궐에 울렸다.
쌀이 열매달린 숲이 변방에 축축 늘어지고 연기가 아닌 색이 서울에 환히 빛났다.
이러한 상서는 곧 태어나신 날과 정사에 임한 때에 응답한 것이다.
우러러 생각컨대 태후께서는 은혜로움이 땅처럼 평평하여 백성들을 어진 교화로 교화하시고
마음은 하늘처럼 맑아서 부자(경덕왕과 혜공왕)의 효성을 장려하셨다.
이는 아침에는 왕의 외숙의 어짐과 저녁에는 충신의 보필을 받아 말을 가리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행동에 허물이 있으리오.
이에 유언을 돌아보고 드디어 옛뜻을 이루고자 하였다.
유사(有司)에서 일을 준비하고 기술자들은 밑그림을 그렸다. 때는 신해년(771) 12월이었다.
이때 해와 달이 교대로 빛나고 음양의 기운이 조화롭고 바람은 따뜻하고 하늘은 고요한데,
신성한 그릇(鍾)이 완성되었다.
형상은 산이 솟은 듯하고 소리는 용의 소리 같았다. 위로는 유정천의 꼭대기까지 꿰뚫고 아래로는
귀허(歸墟)의 밑바닥까지 통하였다.
그것을 본 자는 기이하다고 칭송하고 그것을 들은 자는 복을 받았다.
원컨대 이 오묘한 인연으로 존엄한 영령을 받들어 도와서 두루 들리는 맑은 소리를 듣고
말을 초월한 법연에 올라감에
과거ㆍ현재ㆍ미래를 꿰뚫는 뛰어난 마음에 계합하고 일승의 참된 경계에 머물게 하며,
나아가 왕손들이 금으로 된 가지처럼 영원히 번성하고 나라의 왕업이 철위산처럼 더욱 번창하며,
모든 중생들이 지혜의 바다에서 함께 파도치다가 같이 세속을 벗어나서 아울러 깨달음의 길에 오르소서.
신 필오는 졸렬하여 재주가 없음에도 감히 성스런 왕명을 받들어 반고의 붓을 빌리고 육좌의 말에 따라
그 서원하는 뜻을 서술하며 종에 명을 기록하노라.
한림대 서생인 대나마 김부환이 쓰다.
그 사(詞)에 이르되,
하늘에 천문이 걸리고 대지에 방위가 열렸으며, 산과 물이 나란히 자리잡고 천하가 나뉘어 뻗쳤다.
동해 가에 뭇 신선이 숨은 곳, 땅은 복숭아 골짜기에 머물고 경계는 해뜨는 곳에 닿았다.
이에 우리나라가 있어 합하여 한 고을이 되었다.
오묘하고도 오묘하도다 맑은 교화여! 멀고 가까운 곳에서 능히 이르게 하였다.
은혜를 멀리까지 입게 하고 물건을 줌에 고루 젖게 하였다.
무성하도다 모든 자손이여 안락하도다 온갖 동포여. 수심어린 구름이 문득 슬퍼지니,
지혜의 태양에 봄이 없구나.
공경스럽고 효성스런 후손이 왕업을 이어 기틀을 베풀었다. 풍속을 다스리되 옛 것에 따르니,
풍속을 옮아감에 어찌 어김이 있으랴. 매일 부친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항상 모친의 모습을 그리워하였다.
다시 복을 닦고자 하늘종으로서 빌었다.
위대하도다 우리 태후시여! 왕성한 덕이 가볍지 아니하도다.
보배로운 상서가 자주 출현하고 영험스런 부응이 매양 생겨났다.
임금이 어질매 하늘이 돕고 시절은 태평하고 나라는 평안하였다.
조상을 생각하기를 부지런히 하고 그 마음을 따라 서원을 이루었다.
이에 유명을 돌아보고 이에 종을 베꼈다.
사람과 귀신이 힘을 도와 진기한 그릇이 모습을 이루었다.
능히 마귀를 항복시키고 물고기와 용을 구제할 만하다.
위엄이 동방에 떨치고 맑은 소리는 북쪽 봉우리에 울렸다.
듣는 이나 보는 이가 모두 믿음을 일으켜 꽃다운 인연을 진실로 씨뿌렸다.
원만하게 빈 속에 신기한 몸체가 바야흐르 성인의 자취를 드러내었다.
영원히 큰 복이 되고 항상 장중하리라.
한림랑인 급찬 김필오가 왕명을 받들어 짓고, 대조인 대나마 요단이 쓰다.
검교사 병부령 겸 전중령 사어부령 수성부령 감사천왕사부령이자 아울러 검교진지대왕사사인
상상 대각간 신 김옹 검교사 숙정대령 겸 수성부령 검교감은사사인 각간 신 김양상
부사 집사부의 시랑인 아찬 김체신
판관 우사록관사인 급찬 김충득
판관 급찬인 김충봉
판관 대나마인 김여잉유
녹사 나마인 김일진
녹사 나마인 김장간
녹사 대사인 김▨▨
주종대박사 대나마 박종일
차박사 나마 박빈내
나마 박한미
대사 박부부
대력 6년(혜공왕 7년) 세차 신해(771) 12월 14일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해석자 : 남동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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