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얼이 담긴 문화재

조선왕릉

창현마을 2009. 6. 29. 09:46

 

 

 

 

조 선 왕 릉

 

 

 

[세계일보] 2009년 06월 28일(일) 오후 09:09
 
 
조선왕릉 가운데 왕의 무덤이 홀로 있는 곳은 태조의 건원릉(경기도 구리), 단종의 장릉(강원도 영월), 중종의 정릉(서울 강남구)뿐이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 강씨와 합장되길 원했지만, 아들 태종은 신덕왕후의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기고 태조의 능을 지금 자리로 정했다. 태조가 신덕왕후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에 반발해 왕자의 난을 일으켰던 구원(舊怨) 때문이다.
천륜도 권력의 냉혹함 앞에서는 힘을 잃는 법이다. 태종은 훗날 잘못을 뉘우치고 태조의 고향 함흥의 억새풀을 가져다 봉분에 심었다고 한다.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은 영월에 유배된 뒤 17세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단종에게 사약을 바치러 가던 금부도사 왕방연은 “천만리 머나먼 곳에 고운님 여의옵고”로 시작되는 시조로 괴로운 심경을 읊었다.
시신은 암장됐다가 200여년이 지난 뒤에야 능으로 격상됐다. 장릉은 이런 탓에 도성 백리 안에 모시는 조선왕릉의 관례에서 벗어난 유일한 왕릉이다.

중종은 승하한 뒤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에 묻혔으나 아들 명종 때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중종 계비 문정왕후 윤씨가 사후에 합장되길 원해 벌인 일이지만, 풍수상의 결함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태릉에 따로 묻혔다. 을사사화를 일으키고 불교 중흥을 도모한 여걸도 사후의 일은 어쩔 수 없었다.

이처럼 조선왕릉은 사연이 많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그제 조선왕릉 40기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키로 했다.
조선에는 태조부터 순종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이 있었지만 죽은 뒤에 왕으로 추존된 경우와 왕비의 무덤이 포함돼 있다.
조선왕릉은 유교와 풍수사상 등 한국 전통의 세계관이 건축·조경 양식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게 특징이다.
제례의식 등 무형 유산의 전통이 이어져온 데다 능참봉을 두고 체계적으로 관리해온 것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조선왕릉은 석실로 만들어졌고 부장품이 많지 않아 도굴 피해가 적었다.
500여년 역사를 지닌 왕조의 왕과 왕비의 능이 온전히 남아 있는 사례는 세계적으로 유일하다고 한다.
이 뜨거운 여름 의관을 갖추고 왕릉을 찾아 역사와 대화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