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과 바다, 그리고 절
▒ 해남 달마산 미황사
▒ 돌배 타고 온 검은 소가 점지한 천년고찰
지금 계룡산 자락에 은거한 채 고요한 평온에 충만한 나날들을 누리고 있는 소설가 송기원은 강원도 묵호를 사람살이의 온정과 감흥 가득 찬 가장
아름다운 고장으로 꼽는다.
시인 신경림은 전주를, 고은은 광주를 마음밭에 새겨두었고. 팔도의 오일장을 누비며 떠도는 장돌뱅이에 대해 남모를 선망을 가지고 있는 나는 역마살
낀 팔자의 후원을 받은 나머지 오랜 세월 꽤나 많은 고장들을 싸돌아다니며 살아왔다.
그러는 사이 몇몇 고장들에 대한 감명과 추억이 가슴에 스미게 되었다. 그곳을 떠올리면 늘상 향수와도 같은 그리운 감회가 스멀거리는 그런
고장들 말이다. 밝은 산수와 맑은 풍정, 따뜻한 인심이 훌륭하게 잘 비벼지고 버무려진 경북 청송은 신의 가호를 받은 고장임이 틀림없다.
고유의 전통 또는 향토적 물색(物色) 향기로운 경남 거창, 큰산 지리산의 덕(德)과 온유함의 협찬을 받아 인간의 마을다운 무진장한 분량의
후끈한 정감을 내뿜게 된 함양땅 역시 삶의 한 시절을 의탁하고 싶은 고장이다.
남도 특유의 흐벅진 풍기(風氣)들과 넉넉한 인정이 흐르는, 동백꽃 피고지는 강진과 해남을 어찌 사모하지 않을 수 있으랴. 달마산 미황사를
찾아 서랍 깊은 곳에 간수한 연서(戀書)처럼 소중히 마음 속 한 구석에 자리한 그리운 고장 해남 가는 행려에 나섰다.
밤고구마가 한창 푸지게 거두어지고 있었다. 해남 밤고구마는 함평 물감자와 함께 남도의 오랜 명물 노릇을 해왔다. 명물이기 이전에
그것은 일종의 구황식물이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난 60년대까지만 해도 고구마니 감자는 오늘날의 라면처럼 너무도 친숙한
물건이었다.
소년 때 고구마 먹던 기억을 떠올리며 해남의 어느 언덕배기 길가 좌판에서 고구마 삶은 것을 사서 먹어 보았으나 어째 예전의 그 맛이
아닌 듯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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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이 변한 건지 고구마 맛이 변한 건지 좌우간 뭔가 변해버린 모양이었다. 고구마를 베어먹으며 바라보니 저 앞에 한 아름다운
바위산이 운무를 휘감고 있는 게 보였다. 좌판 아주머니는 그게 바로 달마산(達摩山·489m)이라고 알려줬다.
“겁나 잘 생겼지라이? 거그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땅끝 앞바다가 한눈에 보여 분답디다.” 폭염으로 검게 그을은 그 아주머니는
막상 달마산에 올라본 일도 없이 그저 먼발치로만 바라보고 살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뭇 흡족한 것 같았다.
멀리서 그냥 지켜보기만 한 채 마음을 그곳에 두는 산의 사랑법, 이 역시 명산을 누리는 하나의 훌륭한 방식에 속할 것이 틀림없다.
고구마 하나를 다 먹어치우는 잠깐 사이 달마산 정상부의 운무는 더욱 짙어졌다. 절묘하고도 길걸하게 늘어선 산정 암봉들이 바야흐로
운무의 치마폭에 완전히 휘감겨드는 중이었다.
땅끝 가는 길목
땅끝으로 가는 길목인 때문인지 꽤나 많은 각처의 휴가 차량들이 오르내렸다. 위도상 한반도의 최남단인 땅끝 옆댕이에는 백사장과
해변 솔숲이 잘 어우러진 송호리 해수욕장이 있으며, 땅끝 부두에는 윤선도가 유배를 살았던 보길도를 드나드는 배편도 개설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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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과 백리쯤 상거한 북쪽에는 대흥사 들어앉은 두륜산이 있으며, 아름다운 작은 산 달마산은 그 중간쯤 되는 위치에 치솟았다. 해남 현산면 월송리에서 국도를 벗어나 달마산에 이르는 좁다란 포장길로 접어들자 갑자기 적막감이 깊어졌다. 차량 통행이
거의 보이질 않는 한가한 길 옆 사방의 들판에서 온갖 농작물들이 탐스러운 초록빛을 내뿜으며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곳 조용한 들판 여기저기에 하나둘씩 농부들이 납작하게 눌러앉아 뭔가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띄엄띄엄 오래된 농가들이 자리한 게
눈에 들어왔고, 인적 없는 그 시골집 토담 위에 호박덩이들이 벌써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달마산의 수려한 경관을
배경으로 걸친 나머지 더없이 포근하고도 정겨운 전원마을의 정취가 물씬거렸다.
이런 곳에서 욕심 없는 한가한 시골살이에 자족할 수 있다면 행복하리라. 닭 우는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들판으로 출근하고, 해지는
저녁엔 도랑물에 호미를 씻으며 하루의 노동을 마감하는, 그런 단순하고도 깨끗한 일상 속에서 겸허히 자족할 수 있다면 복된 삶이라 일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독사처럼 똬리 튼 천박한 욕망은 늘 무엇엔가 홀리어 급기야 삶의 꼬불꼬불한 미로 속으로 접어들게 되는 게 아닌가.
자족하는 겸허한 삶이란 사실 가당치도 않은 선망에 불과한 것이기 십상이다.
미황사(美黃寺)는 달마산 서쪽 기슭에 자리해 있었다. 산정에 흐르는 운무의 그림자가 산기슭에 번져 한낮임에도 경내 분위기는 침침해
보였다. 그리고 도처의 풍경이 어수선했다. 거창한 축대 공사가 벌어진 바람에 곳곳이 파헤쳐진 상태였다. 그러니까 기대 밖의 반갑잖은
풍경과 대면하게 된 셈이었다.
치우친 고정관념일지 모르지만 절간을 파헤치는 공사 장면을 보면 늘 심사가 개운치 않다. 미황사 공사는 대충 보기에도 거대 규모의 성형
수술임이 분명했다. 가급적 가람의 덩치를 극대화시키겠다는 의도가 여실해 보였다. 성채와도 같은 장중한 석축이 쌓아지는 중이었다.
미황사는 초행이라서 본디 모습을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아쉬운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굳이 위압적인 석축이 아니라더라도 완만한
경사면을 자연스레 살려내는 도량 단장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미황사의 본사인 대흥사가 거찰이면서도 자연스런 풍색을 고스란히 유지함으로써 사찰의 품격을 한결 드높인 사례를 본으로 삼았으면 좋지
않았겠느냐는 감상이 거듭 머리를 스쳤다. 그나마 돌덩이들을 무슨 기계적으로 깎은 물건이 아니라 생긴 그대로의 자연석을 활용한 것은
다행스러웠다.
남성적 미태에 충만한 산
점심을 마친 휴식시간인지 굴삭기 따위 중장비들은 작동을 멈춘 채였고, 작업자들은 베어져 나뒹구는 거목 토막을 침상 삼아 낮잠에
빠져 있었다.
수염 덥수룩한 스님 한사람이 쿵후영화에서 방금 튀어나온 배우처럼 웃통을 벗어제낀 채 엄청나게 커다란 상자를 옮기는 모습이 보였을 뿐
모든 움직임이 정지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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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파헤쳐진 절간 풍경은 산판 작업장처럼 어수선했으며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고 있었다.
산정의 운무도 응고된 연고처럼 침울하게 뒤엉겨 꼼짝을 하지 않았다.
달마산 맞은편 저 멀리 어란포 앞바다가 아스라이 눈길에 들어왔으나 수족관에 차오른 물처럼 권태롭게만 느껴졌다. 하늘의 모든
둘레로부터 어두운 구름장이 점차 두터워지는 기미가 뚜렷했다.
목탁 소리도, 경쇠 소리도, 향 내음도 일체 감지되지 않는 다소 기이한 분위기 속에서 미구에 몰아칠 폭우에 대한 예감만 기민하게
엄습해왔다. 그럴 필요도 없건만 괜히 서두르는 마음이 되어 경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몇 해의 신축 요사들은 높은 담장을 두르고
있었고 그것은 보기에 편치 않았다. 곳곳에 출입금지 팻말과 철조망이 가로걸려 발길을 막아세웠다.
주지의 취향에 따른 장치들이겠으나 덕분에 옹색한 분위기를 얻어걸친 형국이 돼 있었다. 예전에 미황사를 다녀온 몇몇 친구들은
미황사야말로 실로 순하고 정결스런 멋이 진동하는 드문 산문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마음속에 홀로 숨겨 두고 싶은 절간이라고
선전하는 소리도 들었다. 그때의 그 모습은 이제 사라져가고 있는 것일까. 난장판과도 같은 공사의 와중이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거창한
석축 설치로 뭔가 균형과 조화가 깨어지고 있는 성싶어 자꾸 아쉬운 마음이 앞섰다.
가람을 획일적 구도로 몰아가는 효과를 나타낼 장대한 석축 설치는 종전의 예스런 정취를 마음껏 앗아버리는 대신 무미건조한 풍경을 선사할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달마산은 남성적인 미태에 충만한 산이다. 완강한 교각처럼 하늘을 투철하게 떠받친 칠칠한 암봉들은 거칠 것
없이 활달하다. 그 산자락에 수줍음 타는 가인과도 같은 미황사가 동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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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미황사 풍치는 아무래도 이쯤으로 표현될 수 있었을 것 같다. 아무려나 미황사 대웅보전(보물 제947호)의 절묘한 앉음새는 자연과
인공의 조화와 화해를 능란하게 주선했던 옛사람들의 경탄할만한 감각을 유감없이 증거해 보인다.
대웅보전과 달마산의 황홀한 궁합은 그 규모의 크기를 적절히 안배한 솜씨로부터도 비롯된 게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장하되 덩치 작은
달마산의 생김새에 발 맞추어 3칸짜리 아담무쌍한 보궁을 세운 것이니까 말이다.
조선 중후기의 대표적 절간 건축물로 평가되는 대웅보전 둘레에는 흐린 날에도 불구하고 어떤 밝은 서기가 진동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달마산에 뭉쳐 흐르는 생생한 정기가 그 건물의 지붕 위로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대웅보전 내부와 외부의 자유자재한 공포 장식과
빛 바랜 단청은 이 건물의 아름다움과 격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조선 후기에 봉안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삼세불과 근래에 모셔진 삼존불,
그리고 갖가지 탱화가 걸린 대웅전 내부 구성 역시 긴밀한 일체감을 보이고 있다. 대웅보전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응진당은 대웅보전 오른편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무슨 까닭인지 응진당에는 자물통이 걸려 있어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대웅보전과 응진당 외에 지장보살과 그의 권속들을 봉안한 명부전과 서너채의 요사들이 미황사 가람 구성의 중심이다. 최근에는 대웅보전
왼편에 산신, 칠성, 독각을 모시기 위한 삼성각을 새로 짓기 시작했다.
미황사는 유서 깊은 천년고찰이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많은 고승들이 주석하면서 종통을 떨쳤다. 숱한 걸승들이 미황사에서 도를 얻고 이승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연담, 벽하, 설봉, 완해, 창암… 주로 조선 후기에 생멸했던 것으로 헤아려지는 유명 무명의 수많은 화상
들이 미황사의 나날들을 영위했다. 그들의 육신은 지상에서 사라졌으나 부도라는 기념물을 통해 뒷세상까지 이들을 전달하게 되었다
돌배와 소
미황사 경내에서 도솔봉 쪽으로 2킬로미터쯤 오르면 크고 작은 부도와 비석 30여점이 늘어선 부도밭이 나타난다. 비와 바람에 마모된 그
고색창연한 부도들은 미황사의 옛절 위상을 충분히 가늠시키는 소중한 역사 물증이다. 그곳 부도들의 기단 하부에는 대체로 용·학,·연꽃 등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아울러 거북·물고기·게 따위 바다 생물이 나타나 이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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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초석에도 이같은 바다 생물 문양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바닷길을 통해 달마산에 불법(佛法)이 도착했다는 창건 설화와 관련된 암시적 장식들로 해석된다. 미황사에 대한 창건 및 연기 설화는 1692년(조선 숙종18)에 민암(1634∼
1692)이 기록한 「미황사 사적기」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민암은 신라때인 749년(경덕왕 8)에 의조(義照)화상이 미황사를 초창했다고 적었다. 창건 설화의 내용은 자못 신비로운데 간추리자면
이렇다. 어느날 땅끝 사자포 앞바다에 느닷없이 돌배 한척이 나타났다. 그 배로부터는 끊임없이 범패 가락이 울려 퍼졌다. 이에 인근
어부들이 접근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배는 멀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의조화상이 백여명의 제자들과 함께 지극한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비로소 돌배가 육지에 닿았고 배 안에는 화엄경·법화경·비로자나불상·문수보살상 등이 들어있는 금함과 검은 소 한 마리가
실려 있었다. 그날밤 의조는 꿈을 꾸었다. 금인(金人)이 나타나 “나는 우전국(인도) 왕인데 이곳이야말로 일만불을 모실만한 마땅한 인연
토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소에 경전을 싣고 가다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을 봉안하라”고 일렀다. 이에 다음날 의조화상이 분부에 임했는데 소가
문득 눕더니 다시 일어섰다가 재차 드러눕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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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은 소가 누웠던 두 곳에 통교사(通敎寺)와 미황사를 각각 세우게 되었다. 이같은 미황사 창건 설화는 그야말로 설화적 얼개에
휩싸여 있을 뿐이지만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우리 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뒷받침하는 한 자료로 제시되기도 했다. 미황사 아랫마을 이름이
설화 속 경전 짊어진 소의 사체를 묻었던 마을이라 해서 오랫동안 무우동(牛墳洞)이라 불렸던 사실도 흥미롭다.
아무튼 지척에 바다를 두고 있는 미황사 생성과 전개의 배경에는 바다, 그리고 그곳을 생존의 의지채로 여기고 살았던 뱃사람들의 신심
이라는 중요한 요인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미황사의 법화는 창건 이래 줄기차게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러
쇠락의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여기에도 전설적인 일화가 스며있다. 조선말, 미황사 승려들은 ‘궁고’라는 것을 차려 어촌을 돌며
시주에 나섰다고 한다.
궁고란 군고(軍鼓)을 지칭하는 해남지방의 방언으로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전투 직전 징을 짜고 사기를 높이기 위해 울렸던 풍악이었다.
미황사 승려들은 이를 열두채 가락으로 정리해 남사당패처럼 순회 공연을 나섰다고 한다.
그러다가 언젠가 완도땅 청산도 출장갔다가 폭풍우를 만나 파선되는 통에 모든 승려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미황사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지만 사세에 힘이 붙은 이제는 옛얘기가 되었다. 마침내 폭우가 내려치기 시작했다.
이미 오후 작업이 한창인 중장비들의 굉음조차 빗소리에 파묻힐 지경이었다. 멀리 잿빛 바다도, 산정의 암벽들도 비구름에 휩싸여
보이지 않았다.
우산도 없이 그저 비를 맞으며 산사를 내려오는데 엄청나게 커다란 상자를 옮기던 웃통 벗은 스님이 대웅보전 처마 밑에 서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근 천리길을 허덕허덕 달려온 여정이었지만 절에 머문 시간은 고작 두어 시간 남짓이었다. 그 정도가 미황사와 인연된
시간의 전부인 모양이었다. <글·박원식 사진·심병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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