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얼이 담긴 문화재

양주별산대놀이 (楊州別山臺-)

창현마을 2009. 2. 18. 22:39

 

 

양주별산대놀이 (楊州別山臺-)

 

 

 

 

 

 

 

경기도 양주시(楊州市) 유양동(維楊洞)에 전승되고 있는 탈놀이.

 

녹번(碌磻)·애오개[阿峴(아현)]·사직골[社稷洞(사직동)]·구파발(舊把撥)·퇴계원(退溪院)·가은돌[玄石(현석)]·송파(松坡)·의정부(議政府) 등지에서 연희되어 온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분파이다.

 

조선 인조 때 공의(公儀)로서의 산대연희가 폐지되자 이에 종사하던 편놈들은 녹번·노들나루[鷺粱津(노량진)]·퇴계원·사직골 등지로 퍼져 산대놀이단체(契)를 조직하고 각각 연희하게 되었다.

 

<별산대>라는 명칭은 <본산대>와 구별되는 의미로서, 지금은 사라진 본산대를 본떠 만들어졌다고 한다.

따라서 그 양식은 본산대와 대동소이한 것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양주에서 산대놀이가 처음 시작된 시기는 순조·헌종 연간으로 추정되는데, 한양 사직골 딱딱이패를 본떠 가면·의상 등을 제작하고 실제 공연해 본 결과 의외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를 발전시켜 계승한 것이 오늘날 양주별산대놀이로서, 초파일·단오·추석 등 명절과 가뭄이 오래 계속되면 기우제를 지내면서 함께 연희를 베풀었다고 한다.

 

다른 가면극의 연출형태와 마찬가지로, 음악반주에 춤이 주가 되고 노래가 따르는 가무적(歌舞的) 부분과 거기에 묵극적(默劇的)인 몸짓(科)과 덕담(德談) 또는 재담(才談)이라고 하는 사설(白), 즉 대사가 따르는 연극적인 부분으로 구성, 공연된다.

 

각 배역을 보면 옴중·완보·신주부·취발이·샌님(兩班)·신할아비·미얄할미 역은 대사가 있고, 상좌·연잎[蓮葉(연엽)]·눈끔적이·왜장녀·애사당·소무·노장·원숭이·포도부장 역은 대사가 없이 춤과 몸짓으로만 연기한다.

 

대사는 평범한 일상회화조인데, 옴중과 취발이의 대사는 이 놀이 대사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다.

 

과장(科場)은 엄격히 구분되지는 않지만, 대강 8과장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길놀이와 서막인 고사, 제1과장 상좌춤, 제2과장 옴중과 상좌놀이, 제3과장 옴중과 목중놀이, 제4과장 연잎과 눈끔적이춤, 제5과장 팔목중놀이, 제6과장 노장놀이, 제7과장 샌님놀이, 제8과장 신할아비와 미얄할미놀이, 종장(終章) 진오기굿으로 구성된다.

 

이 놀이는 양반과 승려의 위선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모욕으로 서민정신의 승리를 표현하고 있으며, 풍요와 다산(多産)에 대한 기원, 세대교체와 새 생명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등을 담고 있다. 서울·경기지방의 대표적인 탈놀이의 하나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

 

 

 

우리의 전통적인 탈놀이 공간은 개방된 야외 공간으로 특별히 정해진 곳이 없다.

따라서 산 언덕, 마을 공터, 장터, 냇가, 당집 앞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양주별산대놀이의 놀이 공간은 원래 불곡산(佛谷山) 아래의 사직골에 있는 사직단(社稷壇)이었다.

여기에는 사직당이라는 당집이 있어, 마을 제사를 지내고 가면·의상·소도구 등을 보관하던 곳으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마을 당집이라 하면,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공간이지만, 이곳은 탈놀이를 위한 공간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곳은 길놀이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1964년에 백화암 산사태로 소실되어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사직단 앞의 공터가 밭으로 변하면서 인근은 탈판으로 사용되기 어렵게 되었다.


예전의 사직골 놀이 공간은 관객들이 약간 비탈진 곳에 앉았다.

약10도 정도의 경사진 곳으로 탈판이 객석보다 위에 자리잡고, 아래쪽에 관객들이 자리잡았다.

탈판의 작은 공간 한쪽에 개복청(改服廳)을 설치하고, 맞은편에 악사들이 앉는 삼현청(三絃廳)이 있었다.


등장은 개복청이나 악사들이 있는 삼현청으로 한다.

한편 예전에는 관객석 주위로 장사치를 위한 임시 움막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다음에 사용된 공간은 마을 뒷산 송림(松林)속의 잔디밭이었다.

이곳은 옛날 목사관(牧使館) 바로 뒤로, 어사대(御射臺)를 표시하는 비석이 있는 인근 지역의 솔밭이다.

산비탈이 둥그렇고 완만한 경사를 이룬 아래쪽에 평평한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가 놀이마당이었다.

한편 마당의 양편에 서 있는 큰 소나무에 줄을 매고 줄타기도 하였다.


후에 사직당 동쪽 언덕 너머의 비스듬한 잔디밭, 현 놀이마당 뒤편의 방선(訪仙) 폭포 주변의 완만한 산비탈, 향교 외삼문(鄕校 外三門) 안마당, 전수관 동쪽 언덕의 솔밭, 마을 앞의 밤동산, 승학교(乘鶴橋) 건너의 놀이판 등이 사용된 흔적이 보인다.


현재의 놀이마당은 1985년에 전수관 앞뜰에 완공한 타원형의 노천 계단식 공간이다.

관중석 축대 부분은 모두 화강암으로 쌓고 좌석 부분과 놀이마당 부분에는 잔디를 깔았다.


놀이마당은 지상 평면보다 몇 계단 낮은 평면이다.

놀이마당의 공사비는 5천 만원이 소요되었는데. 전액 국고 보조로 이루어졌으며, 큰길에서 전수관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와 전수관 대지에 포함되었던 일부 사유지는 모두가 국가에 자진 헌납되어 완성되었다.


결국 양주별산대의 놀이 공간은 개방된 야외 공간이며, 관객과 연희자가 같이 호흡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양주별산대놀이가 연희되는 시기는 원래 4월 초파일과 5월 단오가 중심이다.

그리고 주요 세시 명절에 연희되었다.

연희 시기는 크게 정기적인 연희 시기와 비정기적 연희 시기로 나뉜다.


우선 정기적인 공연 시기를 보면, 일제시대에 조사된 바로는 음력으로 3월3일,4월 초파일,5월 단오,9월9일에 연희되었다.

비정기적인 공연을 보면, 국가의 경사, 관아의 나례, 기우제, 타 지방 초청 공연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기존의 세시풍속의 행사와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1929년에 조사된 아끼바(○○○)의 기록이나, 50년대 조사된 최상수의 기록에 의하면, 4월 8일의 국사당제, 5월5일의 성황당제에 연희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사월 초파일의 불교적 행사를 이 마을에서는 국사당에서, 5월 단오에는 성황당에서 제를 지내며, 이때에 산대놀이도 같이 공연하였다.

따라서 전통 세시풍속을 마을 제의의 형태로 성격을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3월 3일과 9월 9일은 원래 삼짇날과 중양절이지만, 5월 5일의 단오와 마찬가지로 양(陽)의 숫자가 겹치는 양기가 매우 강한 날이다.

또한 3월 삼짇날은 봄놀이, 5월 단오는 여름놀이, 9월 중양절은 가을놀이의 성격을 지닌다.

일제시대의 대표적 연희자인 조종순은 9월의 황국(黃菊)시에, 아끼바는 단풍놀이에 연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농사 시기로 보아도, 3월 삼짇날은 농사 시작 전에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고, 5월 단오는 본격적 농사 시기로서 모두가 기풍(祈豊)의 시기이다.

또한 9월 9일은 농사가 거의 마무리된 상태에서 행하는 추수감사절의 성격도 지닌다.


이런 날 주민이 모여 한바탕 풀어제끼는 대동 축제의 장이 되고 있다.
한편 해방 이후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8월 추석(이두현 본), 6월 유듀와 7월 백중(김성대 본)에도 탈놀이가 이루어졌다.

주요 명절에 탈놀이가 수시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비정기적인 공연으로는 국가나 지역의 행사, 관아의 나례(儺禮), 기우제, 젊은이의 봄놀이, 타 지방 초청 공연등이다.
특히 섣달 그믐날 행하는 구역(驅役) 의례인 관아의 나례는 아끼바의 기록에만 나타난다.

그러나 국가 주도의 나례가 이미 영조시대에 혁파된 상태에서, 양주에서 관청 주도의 민간 나례가 행해졌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마 유식함을 자랑하던 조종순의 구술에 의한 것이라느 점에서,

예전에 나례와 산대에 참여한 광대들의 일반적 성격을 기술한 것으로 보이다.


한편 57년 채록본에 의하면, "옛날에는 연기자 악사들이 본바닥 사람들이기 때문에 무시(無時)로 산대놀이를 하였고,

본바닥 사람들이 춤을 추려면 이 산대놀이 춤을 춥니다." 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수시로 놀이가 이루어졌다.


결국 양주는 정기적이 공연과 비정기적인 공연을 합쳐서 일년에 최소5회에서 많으면 10회 이상의 공연을 실시하였다.
현재는 양력 5월 5일의 어린이날, 또한 봄(4∼6월)·가을(9∼10월)에 걸쳐 토요일 오후에 놀이마당에서 공연하고 있으며,

기타 외부 초청에 의해 부정기적이 공연이 가끔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