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에 가려진 창건의 베일 벗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결과 백제 최고관직인 좌평의 딸이자 백제 무왕의 아내가 세운 절로 밝혀진 익산 미륵사는 당시로선 최첨단 기술이 접목된 백제 최대의 사찰이다.
당초 이 절은 신라 진평왕의 딸로 미모가 빼어난 선화(善花)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백제 서동 왕자가 나중에 왕(제30대 무왕)이 된 뒤에 이 왕비를 위해 용화산(龍華山) 아래 지었다고 전해져 왔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은 "모름지기 여기(용화산)에 큰 절을 지어주십시오. 제 소원입니다"라고 말하는 왕비의 청원을 받아들여 절 건축을 시작한다.
"무왕이 이 자리(용화산)에 미륵삼존의 상(象)을 만들고, 회전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고 지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
또 신라의 왕인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을 보내서 그 역사를 도왔다는 기록도 삼국유사에 전한다.
그러나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에 따르면 왕비는 신라 출신의 선화공주가 아니라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백제 최대의 탑인 미륵사 석탑은 신라의 도움을 받지 않고, 백제의 독자적인 기술로 만들어졌을 공산도 커졌다. 탑을 지은 주체가 선화공주가 아닐 가능성이 클 뿐더러 당시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신라와 백제간의 전쟁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륵사 공사는 현재 남아있는 절터 크기만 1천338만4천699㎡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절 안에 세워진 석탑도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며 국보 11호로 지정돼 있다. 이 탑은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문화재이기도 하다.
이밖에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1974년 8월 원광대학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때 동탑지(東塔址)도 발견된 바 있다.
또 건물지(建物址)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遺構)가 복합돼 있는 등 미륵사는 삼국시대 말기의 건축 기술이 총망라돼 있는 보고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번에 발견된 사리호 표면에서는 다양한 문양과 세공(細工) 기법이 드러나 당시 백제 금속공예가 절정에 달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처럼 오랜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미륵사가 보수.해체 과정과 유물 연구를 통해 그간 신화 속에 가려진 미륵사 창건의 베일을 벗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미륵사를 창건한 주체가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라는 설화는 전설로만 남게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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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 왕후=선화공주' 설화 '흔들'
석탑서 금제사리기.사리봉안기 발견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창건 시기와 내력이 설화성 짙은 기록으로만 전하는 전북 익산 미륵사가 설화처럼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재위 600-641년) 때 그 왕후가 창건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설화에서는 무왕과 그 왕비인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善花)가 같이 사찰을 중건했다고 했지만,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백제 당시 기록에서는 그 왕비가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佐平)의 딸이라는 구절이 발견돼 주목된다.
나아가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무왕 재위 시대의 기해년(己亥年), 즉 서기 639년(무왕 재위 40년)으로 나타났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지난 14일 석탑 1층 심주(心柱) 윗면 중앙에서 사리공(舍利孔)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무왕 왕후가 조성한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고 19일 밝혔다.
백제 사리장엄구는 2007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부여 왕흥사지 목탑터 출토 창왕(昌王) 시대(577년) 제작품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 발견이다. 1995년 부여 능산리 절터의 목탑터에서도 같은 창왕 시대(567년) 석제(石製) 사리감(사리를 안치하는 시설)이 발굴됐으나 사리장엄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사리공에서는 사리를 담은 금제 사리호(舍利壺)와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 백제 특유의 머리꽂이 장식인 은제 관식(冠飾) 등 각종 유물 500여 점이 수습됐다.
이 중 미륵사 석탑 자체는 물론이고 미륵사라는 사찰 창건 내력을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유물인 금제 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金板)을 이용해 글자를 음각(陰刻)하고 주칠(朱漆)로 썼다.
글씨는 앞면과 뒷면에서 모두 확인됐다. 앞면에는 1행 9글자씩 모두 11행에 걸쳐 99자를 새겼으며 뒷면에도 11행에 걸쳐 모두 94글자를 적었다.
아직 완전한 판독과 해석이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백제 무왕의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에 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나아가 이 기록에는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라는 구절이 발견됐다. 이 구절은 판독자에 따라서는 "백제 왕후와 사택적덕의 딸"로 읽는 견해도 있어 그 정확한 해석은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사택'은 당시 백제의 8대 성(姓) 중 하나다.
삼국유사에서는 미륵사를 창건한 주체를 백제 무왕과 그의 왕비로,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라고 기록했다.
연구소는 이 금판이 발굴됨으로써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 연대 등이 정확하게 드러났고, 아울러 문헌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은 물론 이 시대 백제의 서체(書體)를 연구하는 데도 커다란 획을 긋게 됐다"고 말했다.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금제 사리호는 사리공 중앙에서 발견됐다. 높이 13㎝, 어깨 폭 7.7㎝의 작은 병 형식이며 보주형(寶柱形) 뚜껑을 덮었다. X선 내부 투시 결과 내함(內函)과 외함(外函)의 2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했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사리호 표면에서는 다양한 문양과 세공(細工) 기법이 드러나 당시 백제 금속공예가 절정에 달했음을 입증했다.
연구소는 "이번에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각종 공양품이 일괄로 출토된 데다 가공수법 또한 정교하고 세련되어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유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번 발견으로 백제 석탑의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가 새롭게 드러나고, 더불어 공양품으로 함께 묻힌 은제관식을 비롯한 유물들이 다량으로 확인되면서 그 묻힌 연대가 확정됨으로써 다른 지역에서 이와 같은 유물을 출토한 백제 유적의 축조 시점을 판정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연구소는 "이번 미륵사 석탑 사리장엄구 발견은 무령왕릉 발굴과 부여 능산리 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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