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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창현마을 2007. 12. 11. 10:29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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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세계지도. 세로 148㎝, 가로 164㎝. 1402년(태종 2) 김사형(金士衡)·이무(李茂)·이회 등이 만들었으며 원본은 전하지 않고 사본만 전한다.

 

지도 하단에 권근(權近)이 쓴 발문과 《양촌집》 권22 <역대제왕혼일강리도지>에 의하면 이 지도는 김사형이 명(明)나라에서 가지고 온 원(元)나라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승려 청준(淸濬)의 《역대제왕혼일강리도》를 합하여 이 두 지도에서 미흡하게 다루어진 한국과 일본을 새로 편집한 지도이다.

 

이 지도에 나타난 조선도는 이회의 <팔도지도>라고 추정되며, 일본지도는 박돈지(朴敦之)가 일본에서 가져와 보충해 만든 새로운 일본지도를 참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1267년(원종 8) 베이징[北京(북경)]에서 가져온 자말 알 딘의 지구의(地球儀)와 비슷하게 그려진 것이 많아 이슬람과학의 영향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M.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가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당시 가장 훌륭하고 유일한 세계지도였으나, 중화적 세계관에 의해 중국과 한국을 너무 크게 그려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지 못하였다. 채색필사본. 일본 교토[京都(경도)] 류코쿠대학[龍谷大學(용곡대학)]도서관 소장.

야후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이렇단다. 여기에 더 추가하거나 뺄 능력이 안되므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아무튼 당시 조선인이 생각한 세계가 이렇다. 가장 크고 위대한 문명 중화 명, 그리고 그에 버금가는 소중화 조선, 그리고 나머지 듣보잡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소중화란 중국에 대한 굴종이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선진문명이었던 중국에 이어 그에 버금가는 문명국가라고 하는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지금이야 오히려 중국이 듣보잡취급을 받고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의 미국 이상의 선진국이면서 강대국이 중국이었으니까.

사실 조선이 임진왜란을 앞두고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서도 방심한 데에는 이러한 세계관의 영향이 컸다. 지도에도 나왔다 시피 당시 조선사람들에게 있어 일본이란 조선에 비해 한참 작은 나라다.

 

당연히 바다를 건너 쳐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이전의 왜구에 머리 몇 개 더한 수준의 만 명에서 2만 명 정도나 동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영토는 조선의 두 배를 넘어서고 있었고, 인구에 있어서도 초월한 지 오래였다. 결국 1 ~ 2만 정도만 생각하고 대비해 준비했다가 제대로 털려버리고 말았으니 그것이 임진, 정유 양대 왜란이었다.

그런데 또 일본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고 조선의 탓만 할 수도 없는 것이 일본인이 생각하는 조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 조선에 간첩을 파견해 조선의 지리며 내정을 샅샅이 파악하고 있었다는 소설이나 만화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 오죽하면 원래 전국시대 일본에서라면 다이묘가 도망치면 그 휘하 병사들은 흩어지는 게 당연했는데,

 

조선에서는 어떻게 된 게 조선의 왕이 도망치고 몇 번의 승전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병사와 장수를 베어 쓰려뜨렸음에도 끊임없이 꾸역꾸역 어디선가 솟아나와 압박해 오는 조선군과 의병을 보고는 일선의 무장들마저 조선이란 얼마나 큰 나라인가 두려워하는 마음마저 품었다고 할까?

당시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도 조선은 일본보다 한참 크고 선진적인 문명국이었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이 중화를 동경하듯 조선을 동경하여 조선을 치겠다 출병을 명령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목숨을 걸고 반대하고 심지어 전쟁을 치르던 도중 조선에 투항하여 조선군의 일원으로서 일본군과 싸운 이들마저 있었던 것이다.

 

하긴 한양에 처음으로 진군한 고니시 유키나카조차 어지간한 조선빠라 경복궁의 크고 화려한 모습에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고까지 할 정도이고 보면... 그런 관계는 19세기까지 이어진다.

하긴 동아시아의 경우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유럽 역시 아직까지 지리정보가 어둡긴 마찬가지여서 심지어 중국보다 일본을 더 큰 나라로 여기고 두려워하는가 하면,

 

아즈테카와 잉카를 멸망시킨 자신감으로 중국의 야만인 정도는 약간의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정복할 수 있다며 원정군을 조직하기도 했었다.

 

한 선교사가 목숨을 걸고 유라시아를 횡단해서 중국이 공포로 남아 있는 바로 그 키타이라는 사실을 전해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역사보다 수백 년 더 일찍 유럽 원정군과 중국의 전쟁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대충 그런 시대였다. 그 무렵이라는 게. 

그러고 보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이면서 곤여만국전도가 나오기까지 가장 정교한 세계지도이기도 했다. 그 말은 당시 동아시아 사람들의 지리지식수준이라는 게 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동아시아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아직 교통이나 통신 등의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심지어 지도제작자들조차 현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확한 지식 없이 지도를 만드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지금을 기준으로 당시를 재단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 것을 두고 몇 세기 전의 지도에 나온 그림 몇 개나 그보다 더 오래 전 쓰여진 사료에 나온 문구만으로 무어라도 대단한 걸 알아낸 양 호들갑을 떨어댄다는 건 얼마나 우스운가.

 

그런 식으로 옛 기록에 나온 내용들을 모조리 지도에 옮기려 했다가는 피카소나 달리가 와서 지도를 그려도 부족하지 않을까? 적어도 수십 차원은 되어야 할 지도를 과연 그들이라고 그릴 수 있을까는 의문이지만.

 

그래서 역사라는 게 어렵다는 거다. 의도적이거나 시대적 한계로 말미암은 의도하지 않은 오류나 오해까지 모두 찾아 바로잡아가며 진실에 접근해야 하니.

아무튼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가치라고 한다면 당시 조선인이 생각하던 세계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 버금가는 문명국, 주위의 듣보잡 나라들과는 차원이 다른 문명국이라고 하는 자부심이 그대로 지도로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에서야 사대주의니 비굴함이니 비웃고 경멸하며 욕하는 이들이 이리 많지만 말이다.

하기야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그리 동경하던 중화 중국이 판타지랜드라며 조롱의 대상이 되고, 그리 야만인이라 멸시하던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받던 끝에 일본이라면 똥조차 달다는 일빠들이 이리 많아질 것이라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역사란 돌고 돈다고 하는 모양이다. 음지가 양지가 되고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되고.

 

 

 

 

 

 

 

출처 ; 가난뱅이님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