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명찰 순례

동화사 (1) ; 사찰 문화재의 보고 - 동화사 문화재알아보기

창현마을 2007. 1. 30. 11:47

 

 

동화사 (1) ; 사찰 문화재의 보고

 

                -  동화사 문화재 알아보기

 

 

 

 

 

 

 

 

 

 

 

 

 

 

 

 

 

 

 

 

 

 

 

 

 

 

 

 

 

 

 

 

 

 

 

 

 

 

 

 

 

 

 

 

 

 

 

 

 

 

 

 

 

 

 

 

 

 

 

 

 

 

 

 

 

동화사는 유서깊은 신라 고찰로서 폭포골, 빈대골, 수숫골이 좌우로 몰려든 도학동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493년 극달화상이 창건하였으며, 당시의 이름은 유가사였다. 그후 심지대사가 중창할 때 오동나무 꽃이 상서롭게 피어 있어 동화사라 고쳐 불렀다.

동화사에서 맨 먼저 만나는 건물은 누각 봉서루이다. 봉서루는 오동나무 숲에 둥지를 튼다는 봉황새를 상징하는 누각으로, 오동나무를 뜻하는 동화사와 짝을 이루고 있다.
봉서루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동화사의 중심전각인 대웅전이 정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의 웅대한 건물로 조선 영조대에 지어졌다. 뒤틀린 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해 자연미를 살렸으며, 내부에 아미타불·석가모니불·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다.

 

고개를 숙여 글을 읽는 듯한 이 불상들은 조선시대 선비를 떠올리게 하며 진경산수화풍의 탱화, 천장을 장식하여 극락조가 생기를 불어 넣고 있다. 동화사 동편에는 부속암자인 금당암이 별채를 이루고 있다.

금당암은 사람들의 발길리 뜸한 고요한 암자로 단아하게 균현잡힌 3층석탑 2기가 마주 서 있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믈 제248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당암 앞으로 펼쳐지는 길은 원래 동화사 입구였던 곳으로, 절을 알리는 당간지두(보물 제254호)와 석조부도(보물 제601호)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조금 내려서면 거대한 규모의 '남북통일발원약사여래석조대불'이 숲 사이로 우뚝 솟아 있으며, 이 길이 끝나는 곳인 벼랑바위에는 부드럽고 인자하게 미소짓는 마애불좌상(부물 제243호)이 새겨져 있다.


이외에도 동화사 주위에는 비로암, 염불암, 부도암 등의 유서깊은 암자들이 몰려 있다. 비로암은 매표소 입구 연못에서 바로 보이는 자그마한 암자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비로자나불(보물 제244호)과 삼층석탑(보물 제247호)이 있으며, 입구에 식당이 있어 늘 잔치집처럼 들썩거리는 곳이다.

비로암에서 산길로 1시간 30분가량 오르면 염불암이 나타난다. 염불소리가 들렸다는 전설의 바위 위에 부처와 보살상이 새겨져 있으며 암자를 포근히 감싸고 앞길을 훤히 틔운 산세가 일품이다. 염불암은 1시간 거리에 팔공산 정상인 동봉이 있어 등산객들이 많이 들르는 암자이다.

 

팔공산 주봉인 비로봉이 군사기지로 쓰이면서 염불암은 일반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봉이 되었다. 동봉에 올라서면 팔공산의 장쾌한 산세가 한눈에 펼쳐지며 맑은 날에는 비슬산, 가야산까지 가물가물 잡혀온다.

 

 

  < 문화재를 알아보면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여섯점이 있는데, 그외에도 유형문화재 및

    시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여러점이 있으며, 우선 보물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

 

 

 

동화사입구 마애불좌상

(桐華寺入口磨崖佛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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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종별 : 보물 제243호

 

  부조로 조각된 이 마애불좌상은 동화사 남쪽 입구에 있는 높직한 절벽에 새겨져 있으며 하늘에서 막 내려오는 듯 나는 구름을 탄 개성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는 소라껍데기 모양의 나발이며 육계가 표현되어 있으며, 상호는 원만하고 이마에는 백호가 있던 자리가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좁은 간격으로 평행하게 주름을 표현한 점이 통일신라말기의 형식으로 보인다.

 

가슴과 배에는 내의와 띠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이고 자세는 완전한 결가부좌라기보다는 오른쪽 다리를 대좌 위에 비스듬히 올려놓은 특이한 모습으로 소위 유희좌의 형태이다.

 

  대좌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었는데 하대는 구름무늬에 가려져 중대와 상대만 보인다. 이 구름무늬는 매우 사실적이어서 상대의 화려한 연꽃무늬와 함께 조화를 이루어 불상 전체에 생기를 불어 넣고 있다.

 

마애불로서 상중하대를 모두 갖춘 대좌를 표현하는 것은 드문 일인데 환조로 조각된 불상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대좌가 9세기를 전후한 때부터 유행하고 있었다.

 

  광배는 두 줄의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고 그 가장자리는 화염문으로 장식하였는데 그 표현이 매우 정교하다. 이 불상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대좌나 광배, 형식화된 옷주름 등으로 볼 때 9세기 이후 신라하대 양식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동화사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
  (桐華寺毘盧庵石造毘盧舍那佛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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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종별 : 보물 제244호


민애왕(재위 838∼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동화사 비로암 3층석탑(보물 제247호)과 동시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1.29m의 불상이다.

 

둥근 얼굴은 풍만하고 눈·코·입이 작아지고 있으며, 미소가 사라지고 단아한 모습이다. 어깨는 뚜렷하게 좁아졌으며, 가슴은 평평하고, 하체의 처리도 역시 둔화되었다.

 

이러한 위축되고 둔화된 표현은 9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불상양식이다. 손모양은 비로자나불이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모습으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형태이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있고, 아랫도리에 있는 U자형 무늬가 특이하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배(舟)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광배의 꼭대기 부분에는 삼존불, 양쪽에는 8구의 작은 부처가 배치되어 있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갖추고 있으며 손상이 거의 없는 9세기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 불상처럼 두 손을 가슴앞에서 위아래로 포개어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수인인 지권인을 결한 부처를 비로자나불이라 한다.

 

비로자나는 본래 '광명을 두루 비친다'는 뜻으로 지혜와 광명을 어디에나 두루 비친다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비로자나불은 부처님의 가장 궁극적인 모습인 진신이요, 법신인 것이다

.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는 이 비로자나불상은 호분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춘 완전한 불상으로 중후하면서도 안정된 구도를 보여준다. 불상의 얼굴은 마치 고요한 선정의 세계에 빠져든 선사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광배는 주형거신광배로서 8세기 광배양식과 유사하면서도 훨씬 복잡하게 표현하였다.

거신광내에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여 화려한 보상무늬, 연꽃무늬 등을 가득 배열하고 두광과 신광의 선을 따라 구름 위에 결가부좌한 화불 8구를 배열하였다. 광배의 가장 윗부분에는 삼존불 형태의 화불을 따로 배치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광배는 9세기에 유행한 것이다.

 

  대좌는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유행한 팔각대좌로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원통형에 가까운 중대에는 구름무늬와 사자 7마리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 불상은 뜰앞에 봉안된 삼층석탑 조성기에서 알 수 있듯이 863년에 석탑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신라하대 조각양식 편년에 절대적 자료가 되는 귀중한 작품이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桐華寺毘盧庵三層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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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종별 : 보물 제247호

 

 

 

 이 탑은 신라 민애왕(838∼839)이 왕위다툼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게 되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와 4촌간인 심지대사가 863년(경문왕 3)에 조성한 것으로 민애대왕석탑이라고도 부른다.

 

전체높이는 3.71m이고 기단은 이중기단인데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을 같은 돌로 만들어 각면에 중간기둥 한개를 표현하였다. 갑석은 4개의 돌을 짜맞춘 것으로 윗면에 괴임을 만들고 아랫면은 잘록하게 안으로 파고 있다.

 

상층기단은 중석의 각 면을 1개의 돌로 하고 그 면에 중간기둥 1개를 묘사하였다.

갑석은 2개의 판석으로 구성하였다. 탑신부의 옥개석과 옥신석도 각각의 돌로 만들었다. 옥개석 받침은 각 층 모두 4단이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보주만 남아 있다.

 

 이 탑에서 특이한 것은 기단 갑석의 윗면에 굴곡이 있는 삽입식 받침을 사용한 점인데 이런 형식은 통일신라 말기에 널리 사용되던 형식이다. 1967년 해체 복원 공사 중 초층 탑신에서 외함 역할을 하는 금동제 사방불판 4매와 그 내부에 봉안되었던 납석제 합으로 구성된 사리장치가 발견된 바 있다.

 

현재 동국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납석제의 합 외면에는 이 사리기가 863년 민애대왕을 위해 봉안되었다는 사실이 음각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화사 금당암 삼층석탑

(桐華寺金堂庵三層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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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종별 : 보물 제248호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김당암 극락전 동서 양쪽에 나란히 서 있다. 동탑은 기단의 대부분이 후대에 보수되어 석재의 짜임과 수법이 조화를 잃고 있다.

 

후대에 보수된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을 한돌에 새겼고, 중석에는 우주와 탱주를 모각하였으나 우주를 대나무 모양으로 조각한 것은 특이하다.

 

갑석은 윗면 중앙에 정자형의 괴임이 있고, 네 모퉁이에는 작은 구멍을 뚫어두었다. 탑신부는 우주외에는 다른 장식이 없고, 옥개석은 윗부분에 2단의 괴임을 만들고 아래 부분에는 4단의 받침을 새겼다. 옥개석의 앞부분에는 풍탁을 달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다.

 

서탑은 2중 기단으로 되어 있으나, 주변에 기단 갑석의 조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삼층기단이었는지, 또는 동탑의 것을 옮겨온 것인지 알 수 없다. 지대석 위의 중석은 4개의 돌로 짜여졌으며, 각 면에는 탱주 1개와 우주를 새겨두었다.

 

갑석은 하단의 경우 2매를 붙여 덮었다. 상층 기단의 면석은 각면이 1매의 돌이며, 두면에만 우주와 탱주를 모각하고 다른 두면은 탱주만을 모각하여 우주는 면석을 안으로 들어가게 하여 다른 면석의 측면이 우주가 되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우주를 각출한 것 외에 다른 장식을 하지 않았고 옥개는 아랫쪽에 4단의 받침과 위에 2단의 괴임을 만들었다. 이 탑은 1957년에 해체 보수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1층 탑신 윗면의 사리공 안에서 99개의 소탑과 사리장치가 발견된 바 있다.

 

이들 동서 양탑은 석재의 결구수법이 거의 같으며, 비로암의 삼층석탑과 같이 각 부의 비례가 아름다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다.

 

 

 

 

동화사 당간지주

(桐華寺幢竿支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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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54호

 

당간지주는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운 돌기둥을 말한다. 당간은 당을 달아두는 장대로 보통 철재로 만든다. 당은 본래 사찰의 입구에 꽂는 기당의 일종으로 사찰에서 기도와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당간 꼭대기에 달도록 되어 있다.

 

  마애불상을 지나서 동화사 통일대불의 동측 입구 앞에 있는 금당암 아래 아름드리 나무들 사이에 어울어져 우뚝 선 동화사의 당간지주는 당간은 없어진 채 지주만이 66㎝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양 지주의 안쪽에는 조각이 없고 바깥쪽은 양쪽 각을 없애고 중심에 세로로 1m 길이의 능선을 조각했다. 지주의 안쪽 윗부분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홈을 만들었고 밑에는 둥근 홈을 갖추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당간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은 청주 용두사지, 나주 동문, 공주 갑사, 담양 읍내리 등으로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보기는 어렵다.

 

대부분 동화사의 것처럼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는실정이다. 동화사 당간지주는 대석은 없어 졌지만, 전체적으로 견실하고 장중한 느낌을 주는 반면 세련미는 다소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신라말 동화사의 창건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달성도학동석조부도
  (達城道鶴洞石造浮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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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601호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동화사 안에 세워져 있는 이 부도는 원래 동학동의 학부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긴 것으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基壇)과 탑신(塔身)이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기단은 아래받침돌과 가운데받침돌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윗받침돌은 별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큼직한 연꽃무늬를 소박한 솜씨로 둘러 놓았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고, 널찍하게 마련된 지붕돌은 윗면의 느린 곡선이 처마끝까지 펼쳐지고 있다. 꼭대기에는 아름다운 장식을 한 2단의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각 부분의 양식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출처 : 대구시문화재자료 밀 불교문화재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