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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00년대 백제 도로유적 확인(종합)

창현마을 2006. 11. 21. 14:07

 

 

 

서기 200년대 백제 도로유적 확인
 
 
 
[연합뉴스] 2006년 11월 21일(화) 오전 09:44 
 
 

"풍납토성은 의문의 여지없는 왕성"

너비 8m에 길이 41m, 남북-동서 교차(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서기 200년대 무렵에 조성된 고대 도시의 도로 유적이 서울 풍납토성에서 확인됐다. 이번 도로 유적 발굴은 풍납토성이 백제가 한성에 도읍하던 시대(BC 18-AD 475)의 왕성(왕성) 혹은 왕경(왕경)이라는 사실에 의문의 여지를 없앤 것으로 평가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백제 초기 도성인 풍납토성(사적 11호)에 대한 제1차 10개년 학술조사 추진계획에 의거해 풍납동 197번지 일대(옛 미래마을부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한국 최고(最古)의 도로 유적을 비롯해 대형 폐기장, 석축 수로, 주거지 등 80여 기에 이르는 유구를 확인했다고 21일 발표했다.

나아가 이곳에서는 수천 점에 이르는 다량의 기와를 필두로 각종 토기류, 토제 초석(기둥 받침돌), 철기류 등 유물이 확보됐다.

문화재연구소는 특히 이번에 확인된 도로는 "경주의 신라 왕경이나 백제 사비 시기(A.D.538-660) 부여ㆍ익산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도로에 비해 축조시기가 200-300년 정도 앞서는 것은 물론, 초기 백제의 유력한 왕성으로 추정되고 있는 풍납토성 내에서도 처음으로 확인된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도로는 너비 8m에 길이 41m에 이른다. 남북을 관통하는 이 도로와 교차하는 너비 5m 가량 되는 동서 방향 도로도 드러났다.

조사 결과 도로는 너비 7.5-8m로 땅을 얕게 파낸 후 가운데 부분에 폭 5m, 두께 20cm 정도 되는 잔자갈을 중앙이 볼록하게 깔아 노면을 조성했다. 양 측면으로 빗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축조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조사단은 이처럼 노면에 자갈을 다져 도로를 축조하는 방식에서 사비시기 부여의 궁남지나 관북리 유적, 익산의 왕궁리 유적의 도로가 노면에 특별한 포장을 하지 않는 데 비해 많은 공력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며 풍납토성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고 덧붙였다.

축조시기에 대해 조사단은 이 도로 유적이 한성시대 후기에 들어선 주거지라든가 수혈(구덩이)에 의해 일부가 파괴된 채로 나타나는 점을 볼 때 한성도읍기의 비교적 이른 시기인 3세기 무렵까지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풍납토성 도로 유적은 신라 왕경이나 부여 지역 백제의 도로 유적 조성 연대가 대체로 6세기 무렵인 점과 비교할 때 적어도 300년 이상을 앞서게 된다.

미래마을 부지에서는 이 외에도 각종 석렬과 석축, 수로 등 한성시대에 해당하는 한반도 어느 유적에서도 흔치 않은 유구가 도로와 함께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